아파트 말고 한옥에 살기로 했습니다.

마당에는 계절이 찾아옵니다.

by 은빛구슬
젊은 날에는 깔끔한 아파트를 꿈꿨다.


언제부턴가 우리네 동네를 부르는 이름이 **동에서 **지구로 바뀌기 시작했다. 모든 곳이 그런 건 아니었지만 '동'에서 '지구'로 바뀐 곳에선 기존과는 다른 미묘한 변화들이 일어났다.


그걸 애써 설명하자면 '동'은 변화를 두려워하여 예전의 모습을 절대 놓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고성과 같은 지역이었다면, '지구'는 특별함과 발전을 위해 자신의 과거 정도는 과감하게 벗어던진 혁신의 지역이었다고나 할까? 딱히 그 기준을 명확하게 설명할 순 없지만 둘 사이에는 글자 하나로는 설명이 불가한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그래서 였을까? '동'에서 살았던 나는 그 이름에 맞게 변화하지도 발전하지도 않았다. '지구'에 살았던 친구들이 아파트 평수를 늘려 가며 몇 번의 이사를 하다 결국에는 건물까지 산 건물주가 되고 있을 때도 난 늘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내가 내린 뿌리가 너무 깊어 아무리 세찬 바람에도 꼼짝하지 않는 나무가 된 것처럼 흔들림 없이 나의 자리를 지킨 것이다.


그녀들의 문턱 없는 집을 로봇 청소기가 스케이트를 타듯 유려하게 청소를 할 때, 난 다양한 높이의 문턱을 넘나 들며 청소기를 돌렸고, 무릎에 거무스레한 멍이 들도록 마루를 닦았다. 그뿐이었을까? 친구들이 전망 좋은 카페에 앉아 글이 아닌 브런치를 먹고 있을 때 난 전망 좋은 집을 만들기 위해 시골 아낙네처럼 마당의 풀을 뽑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친구들의 집을 방문하고 온 날이면 난 늘 괜한 자괴감에 혼자 우울해지곤 했다.


그때 '지구'에 살았던 친구들은 공주, '동'에 살았던 나는 무수리였다. 어느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난 스스로 그렇게 선을 그었다. 하지만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는 어리석은 행동은 하지 않았다. 최소한 내 자존심은 지켜줘야 했으니 말이다.

나이가 드니 마당 넓은 집이 좋다


그런데 내가 나이를 먹었다. 아주 많이 먹었다. 배가 나오도록 먹었다. 지천명, 지금 난 하늘의 뜻도 이해한다는 나이가 되었다. 그래서인지 세상을 보는 눈이 너그러워졌다. 이게 단순한 포기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님 진심으로 욕심이 사라져 생긴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어찌 되었건, 이제 난 그 어떤 것도 부러워하지 않게 된 것이다.


내가 나의 집을 향해 마음을 여니 나의 집 역시 슬그머니 내 옆으로 다가와 자신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우리 집 마당에는 계절이 찾아온다.


봄에는 서늘한 바람이 꽃들의 미소와 함께 날아오고, 여름이면 쨍한 햇빛이 녹색의 푸르름과 함께 밀고 들어온다. 가을이면 알록달록 예쁜 단풍이 마지막 계절을 준비하라 타이르고, 겨울에는 차가운 바람이 정신을 바짝 차리게 하여 새해를 준비케 한다.


그리고 우리 집 마당은 수확의 기쁨도 안겨 준다.


봄을 맞이한 우리 집 마당엔 많은 나무들이 잎과 꽃을 피우며 열매를 마중할 준비를 하고 있다. 매화꽃이 진 자리에 매화가 열렸고, 오디나무엔 오디가 포도나무엔 포도가 열렸다. 사과와 블루베리꽃이 피고, 감나무엔 푸른 잎이 돋았다. 이것들은 자라고 자라 여름이나 가을이 되면 달콤한 열매를 선물할 것이다. 내가 키운 열매는 돈으로 살 수 있는 게 아니다. 그 자리에서 똑 따먹는 그 풋풋함은 어디에서도 돈으론 살 순 없기 때문이다.

블루베리꽃과 사과꽃. 오디나무와 감나무.


전에는 정원 가꾸는 일이 귀찮아 넓은 마당을 싫어했다. 풀을 뽑는 일도, 떨어진 낙엽을 치우는 일도 싫다며 불평을 했다. 그런데 이제는 볕 좋은 날 마당에서 풀 메는 일이 즐겁다. 다리가 저려도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는 마음을 억지로 다스려야 할 정도가 되었다.

풀이 자라면서 잔디가 죽었다. 깔끔하게 풀을 뽑았다.


여전히 나의 집에서 살고 싶다.


지금 우리 동네는 동서남북으로 아파트가 자라고 있다. 여기저기 땅들이 파헤쳐지면서 우리 동네가 '**지구'라는 타이틀을 갖게 된 것이다. 예전 같았으면 그런 변화에 춤이라도 췄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그런 변화는 이제 나와는 상관이 없다. 왜냐고?


백세 인생에서 인생 2막의 첫걸음은 내려놓는 일로 하고 싶다. 세련됨과 도도함으로 목을 세우는 일 없이 소박한 모습으로, 누군가를 부러워하기보단 그저 성실하게 자신의 일에 충실한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면서.

보지 않고 지냈던 것도 보게 된다. 시누이의 글씨도.

우리 동네가 '**지구'가 되어 아파트가 넘쳐나더라도 난 여전히 마당 넓은 우리 집을 지키며 살아가고 싶다.


아니, 반드시 그리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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