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에서 고성으로, 흙에 뿌리내린 믿음 이야기
십수 년 전, 경기도 이천에서 한 젊은 부부가 어린 아들 둘을 데리고 남쪽 끝 고성으로 내려왔다. 공룡나라라 불리는 이 고장엔 들꽃이 지천이고, 봄이면 산벚이 바람에 눈송이처럼 흩날린다. 그들은 수도권의 편리함 대신 지방의 흙냄새 나는 삶을 택했다. 손에 물집이 잡히고 허리가 휘더라도 땅에 닿은 삶이 좋았다. 그렇게 낯선 마을에 첫 삽을 뜨며, 조용히 뿌리를 내렸다.
처음엔 모든 게 서툴고 낯설었다. 젖소 몇 마리를 들여다 키우며 하루가 멀다 하고 축사로 향했지만, 겨울밤이면 찬바람이 살결을 파고들었다. 축사 옆 조립식 집은 바람만 불어도 덜컹거렸고, 새벽엔 하얀 입김이 방 안을 떠돌았다. 그래도 남편은 매일같이 새벽의 냉기를 헤치며 우유 짜는 일을 거르지 않았고, 아내는 그 곁을 항상 지키며 밥 냄새로 가족의 하루를 깨웠다. 그렇게 흙먼지 속에서 쌓인 세월이 어느새 십 년을 훌쩍 넘겼다.
이제 그들 곁엔 네 아이의 웃음이 있다. 아들 둘에 쌍둥이 딸 둘, 웃음소리가 들판을 달린다. 축사 자리에선 더욱 많아진 젖소들이 여유롭게 되새김질하고, 저너머의 축사에선 누우런 황소들이 묵직한 숨을 내쉰다. 하우스에는 이제 갓 심어진 딸기와 호박이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다. 비닐하우스가 줄지어 선 모습이 꼭 이 부부의 삶 같다. 단단하고, 꾸밈없고, 성실하다. 처음엔 조립식 집에서 겨울을 견디던 그들이 이제는 여섯 식구가 오순도순 살 수 있는 아늑한 집을 지었다. 마당엔 아이들 발소리가 끊이지 않고, 저녁이면 부엌 창문을 스치는 노을빛에 아내의 미소가 고요히 물든다.
이 부부를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절로 고요해진다. 그들의 하루는 거창하지 않지만 단정하고, 화려하지 않지만 아름답다. 맡은 일을 끝까지 해내는 책임감, 서로의 마음을 먼저 읽어주는 배려,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게 흐르는 사랑이 있다.
삶이란 게 꼭 새롭고 대단해야 빛나는 게 아니라는 걸, 이 두 사람은 조용히 증명해내고 있다. 물론 삶이란 게 결코 만만하지가 않다. 그들 또한 세찬 풍파를 수도 없이 겪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견디며 인내할 수 있도록 사랑하는 가정이라는 피할 길을 마련하여 주셨다.
어쩌면 믿음이란 것이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생각 없이 하는 기도소리보다 더 깊은 신앙이 그들의 손마디마다 스며 있고, 들판을 스치는 바람 속에도 감사가 깃들어 있다.
고난이 닥쳐도 원망 대신 감사로 견디고, 지쳐 쓰러질 때는 서로의 어깨를 내어주며 “괜찮아”라고 말한다. 그들의 믿음은 요란하지 않지만, 오래도록 마음을 덥힌다.
이천에서 내려온 그 두 사람은 이제 고성의 흙과 바람이 되어 살고 있다. 봄이면 딸기꽃이 피고, 여름이면 호박이 영글고, 가을이면 들판이 노랗게 물든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그들의 삶도 한결같은 성실로 익어간다.
나는 그들을 생각할 때마다 마음 한편이 따뜻해진다. 세상이 아무리 빠르게 변해도, 여전히 하늘 아래에는 이렇게 성실하고 단단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이 고맙다.
하늘의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축복은, 어쩌면 풍요나 성공이 아니라 “성실하게 사랑하며 사는 힘”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