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악양 마을의 가을

가득 찬 가을날의 감사

by 강석효

가을로 가득 찬 만추의 풍경은 늘 그렇듯, 한 세상을 살아낸 사람의 얼굴을 닮았습니다. 곱게 단풍이 들어도 그 안엔 수많은 바람과 비, 그리고 더운 여름의 숨결이 켜켜이 쌓여 있지요. 마을 어귀로 들어서면 노란 은행잎들이 길바닥에 이불처럼 깔려 있고, 감나무는 늦가을의 주홍빛 고백처럼 가지마다 익은 홍시를 매달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마치 “이만하면 됐다”고 말하듯, 한 해를 마무리하는 평안한 표정으로 바람에 흔들립니다.

그 길목을 지나 악양마을로 향하다 보면, 동네 길가에서 수확한 나락을 말리는 칠순이 훌쩍 넘은 하평홍 집사님과 들깨를 틀고 계시는 이정분 권사님 부부의 모습이 눈에 들어옵니다. 해마다 가을이 오면 늘 그 자리에서 들깨를 털고, 나락을 말리고, 햇살과 바람의 결을 따라 하루를 엮어가십니다. 두 분의 손은 거칠고 굽었지만, 그 손에서 흘러나오는 온기는 묘하게 따뜻합니다. 오랜 세월 흙을 만져온 손이기에 그런가 봅니다. 믿음도 흙과 같아서, 꾸준히 갈고 심고 기다려야 열매를 맺는 법이지요.

“농사짓는 재미요? 나눠주는 재미지요.”

언젠가 권사님이 환하게 웃으시며 던진 말 한마디가 제 마음을 찌릅니다. 이른 새벽부터 해질녘까지 흙먼지를 뒤집어쓰며 일하는 이유가 ‘누군가의 밥상이 풍성하길 바라는 마음’이라니, 그것이 바로 복음의 마음이 아닐까요. 주님이 말씀하신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이 있다’는 말씀이 이 부부의 삶 속에서 고스란히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그분들의 마당에는 언제나 햇볕에 말리는 곡식 냄새가 납니다. 그 냄새는 단지 들깨나 나락의 냄새가 아니라, 감사와 기도의 냄새 같습니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이 부부의 삶은 변함없이 ‘감사’로 익어가고 있습니다. 마치 만추의 단풍이 한껏 물들어 더 이상 물들 데 없는 것처럼, 그들의 믿음 또한 한층 더 깊어져 있습니다.

신앙이란 어쩌면 이런 것일지도 모릅니다.

세상을 요란하게 흔들며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조용히 제 자리를 지키며 누군가의 삶을 조금 덜 춥게, 덜 허기지게 만들어주는 일. 밭 한 자락을 갈며 기도하듯, 작은 손길 하나에도 사랑을 담는 일.

가을이 깊어질수록 그분들의 삶이 더 또렷이 보입니다.

화려한 단풍보다, 탐스러운 감보다, 나락의 황금빛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그들의 굽은 허리와 닳은 손마디에 배어 있는 신앙의 향기입니다. 그것은 마치 오랜 세월 하나님과 동행한 자만이 풍길 수 있는 향내입니다.

이 만추의 들녘을 바라보며 문득 깨닫습니다.

믿음도, 인생도 결국은 ‘농익는 것’이라는 사실을요.

너무 일찍 꽃을 피우려 애쓸 것 없습니다. 바람 맞고 비 맞으며, 묵묵히 하루를 견디다 보면 하나님께서 때가 되어 그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그때 우리는 이렇게 고백하게 되겠지요.

“주님, 제 삶도 이렇게 익어가게 하소서. 누군가의 손에 들려질 수 있는 열매로, 누군가의 마음을 따뜻하게 덮을 낙엽으로, 그렇게 익어가게 하소서.”

만추의 들녘 한가운데서, 그 노부부의 믿음이 오늘도 조용히 익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습이 우리 모두의 가을 신앙을 비추는 한 줄기 빛이 되어줍니다.

keyword
토요일 연재
이전 11화교회에서 자라난 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