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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얀얀 Dec 15. 2022

그렇게 부잣집 딸이 된다



아빠는 고루한 사람이었다. 고루함의 사전적 의미는 '낡은 관념이나 습관에 젖어 고집이 세고 새로운 것을 잘 받아들이지 아니하다'라고 한다. 딱이잖아, 아빠에게.

여자라서 하면 안 되는 일도 많았지만 여자라서 대충 넘어가고 보호받는 일도 많았다. 아빠에게 여자란, 집에서 애들 키우고 꽃처럼 웃고 상냥하게 아주 살랑살랑, 그런 정도의 이미지였던 것 같다. 허나 애석하게도, 우리 집 여자들은 하나같이 애교가 없다.(아빠 대유감) 

원흉은 엄마. 아주 강력한 유전인자가 이어지고 있는 중이다. 엄마는 때때로,

너희라도 아빠한테 살갑게 하고,
애교도 좀 피우면 얼마나 좋아.


하시곤 했다.

대신 나는, 우렁찬 목소리로 이런 걸 했.

아빠! 나 또 학교 늦었어~
 나 태워주고 가!!


학교는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었다. 옛날 학교들이 좀 그런 편인데, 교문까지 도저히 용인할 수 없는 급경사가 이어졌다. 학교 초입인 길목에서 교문까지 오르면 청순한 여고생의 얼굴은 자주 사나워졌다. 

겨울에 눈이 오면 빙판길이 됐다. 교복 치마바지처럼 잡아 꾹 누르고 엉덩이로 미끄러지며 발로 브레이크를 살살 잡아가며 했다.(염화칼슘은 없었던 걸까) 그러니 체력과 마음이 한 뜻으로 유약한 나는 등굣길이 귀찮고 버거웠다. 하여,  많이 괴로운 날에는 이렇게 아빠 찬스를 쓰는 거다. 아빠는 아침식사를 하다가도 나의 호출이 오면 국을 후루룩 마시고 주섬주섬 옷을 갈아입으셨다. 고지식한 사람은 애가 학교에 늦었다고 하면 보통 밥을 편히 먹을 수가 없다.



교문까지 차를 타고 등교하는 것은 당연히 안된다. 중간에 길이 꺾이는 공터에서 항상 내렸다.

아빠, 나 갈게.


차에서 내린 딸이 사뿐사뿐 멀어진다. 길에는 여자아이들이 버글버글하다. 오늘도 안 늦었다. 고마워, 말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런  참는데 능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 하나가 생뚱맞은 말을 한다.



야, 너 부잣집 딸이라고 소문났어.

사정은 대충 이러했다. 내가 곧잘 아빠 차를 타고 학교에 오는 걸 본 아이들이 한 다리, 두 다리 건너, 입에서 입으로 구르고 굴려 그렇게 내가 부잣집 딸이 된 것이다. 아빠의 차는 그랜저였다.

당시, 나는 쉬는 시간이 되면 잽싸게 매점으로 달려가 핫도그를 사 먹었다. 점심시간에는 뻥이요, 크림 맛 산도를 챙겨 먹는 걸 놓치지 않았고. 그러니 인정하겠다. 그래, 나는 부자. 부잣집 딸 걸로 하지 뭐.




그렇게 부잣집 딸이 된다.









    [사진 출처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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