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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잘리 Oct 14. 2019

얼음공주 아닌 덜렁이

마음만은 따뜻한 여자예요, 아시겠어요?

차가워 보인다, 새침데기 같다, 깍쟁이 같다.

겉으로 보이는 이미지만으로 자라면서 내가 가장 많이 들은 말들. 대충 요약하자면 이렇게 세 가지이다.


어린 시절 난 친구들 사이 별명이 많았던 별명부자였다. 웃지 않고 무표정으로 있으면 말 한마디 붙이기가 어렵다고 해서 초등학교 때 친구들 사이 자주 불리던 별명 중 하나가 얼음공주였다.


별명만 들어서는 눈만 스쳐도 꽁꽁 얼어버릴 것 같은 쌀쌀맞고 차가운 이미지가 연상되지만 사실 난 얼음공주가 아닌 털털한 덜렁이일 뿐. 굳이 별명을 붙이자면 얼음공주처럼 생긴 덜렁이 쪽이 맞는 것 같다.


덜렁이 사건 파일은 대충 이렇다.


출근할 때 깜빡하고 머리에 헤어롤을 달고 나가는 건 기본이요 정장에 삼선 슬리퍼를 신고 나갔다 되돌아오기도 두어 번, 어느 날은 전날 중요한 물건들을 넣어 둔 가방을 잊어버리고 옷걸이에 있는 다른 가방을 들고나가 곤란했던 적 또한 한 두 번이 아니었다.


회식 때마다 내가 마시던 컵 두고 옆 사람 컵을 매번 집어 들어 옆 사람 당황시키는가 하면 퇴근 후 휴대폰 충전기만 꽂아둔 채 멀티탭에 스위치를 켜지 않아 다음 날 배터리 용량을 보고서 좌절한 적도 부지기수였다.


 덜렁거리는 탓에 걸어 다닐 때마다 바닥에 자주 발이 걸리는 편이라 새로 산 구두와 운동화 앞볼은 며칠 지나지도 않아 찍 혀 있을 때가 많았고 일기예보를 보며 우산을 챙겨놓고도 그대로 신발장에 올려둔 채로 나 비를 쫄딱 맞고 퇴근한 적도 많았다.

 

하지만 덜렁이 인생에 최고 정점을 찍은 사건은 얼마 전에 일어났다.


사건 당일 아침. 모처럼 시간이 난 아빠께서 오랜만에 회사 데려다주시기로 했던 날. 다른 날처럼 버스를 타지 않아도 되니 마음이 한결 여유로웠다.


여유로운 시간 탓에 동네 편의점 앞에 잠시 차를 세워두고 혼자 훈제란과 음료수 등 필요한 물건을 사러 들어갔다. 평상시 같았으면 조급한 마음에 서둘러 살 물건만 들고 나왔을 텐데 편안해진 기분 탓인지 이것저것 눈에 들어오는 먹거리들이 많았다.



편의점으로 쇼핑이라도 나온 듯 회사에 다른 동료 들것까지 그렇게 한참을 먹거리와 필요한 물건을 고르고 골라 계산을 마친 후 밖으로 나왔다.  


내가 짐 들고 나올 걸 생각해 내가 탈 곳의 문까지 미리 열어놓으셨나 보다 센스쟁이 아빠라 생각하며 자연스레 거침없이 열린 문 앞자리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차 문을 닫고 옆을 본 순간.



정말 말 그대로 개당황한 표정의 낯선 남자 한분이 운전석에 앉아 계셨다.


누가 뭐라 할 것도 없이 그분과 나, 둘 다 동시에 얼음이 되어버렸다. 누가 땡을 외쳐주기 전에는 답이 없는 순간이었다.


차를 탄 순간 눈치챘어야 했다. 조금은 낯선 방향제 향기와 내 볼에 느껴지던 어쩐지 따가웠던 시선을. 

 

거기서 빨리 내렸어야 했는데 한수 더 떠 황당한 표정의 운전자분을 보며 내뱉은 나의 한마디.


"누구세요?"


왜 그랬을까? 술도 못 마시면서 맨 정신에 그것도 아침부터. 쥐구멍이라도 있음 숨고 싶은 심정이 딱 그런 건가 싶었다.


잠시 뒤 빵빵거리며 뒤에서 들려오는 경적 소리에 뭔가 잘못됐구나를 눈치채며 차에서 내려 후다닥 뒤에 세워진 우리 차로 향했다.


대충 같은 색인 것만 보고 남의 차를 타다니 그것도 모자라 누구세요? 라니. 옆 집 세 살 꼬마도 가게 앞에 서 있다 저 멀리 자기 아빠 차가 보이면 손가락을 들 " 아바 따! 아바 따!"를 외치던데.


남의 차에 탄 것도 모자라 누구세요...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빼는 것도 아니고 얼마나 황당하셨을까?

 

괜찮아요? 많이 놀랐죠? 이 자리를 빌어서라도 그분께 사과하고 싶다.


정말 평생을 두고도 못 잊을 그 날. 민망한 사건으로 치자면 명예의 전당에 오를법한 사건이었다.


"넌 참 안 그럴 것 같이 생겨서는 깬다, 얘!" 소리를 종종 듣는 나.


덜렁거리는 게 내 일상이기 하지만 누구보다 정이 많은 것도 사실. 조금의 낯가림이 있긴 해도 한번 친해지면 누구보다 진솔하고 얼음공주가 아닌 얼음마저 녹여버릴 따뜻한 마음을 가진 여자. 그게 바로 나다.


그러니 사람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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