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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잘리 Oct 14. 2019

홍콩 할매와 바비인형

부러우면 지는 거다.

유치원 시절 내가 살던 집엔 나와 같은 또래 여자 아이가 살았다. 난 병설유치원 그 앤 사립유치원 물론 그 앤 집주인 갑의 딸이었고 난 세입자 을의 딸이었다.


그 애 엄마 말로는 자기 딸은 욕심도 많고 질투도 많아 별명이 샘쟁이라고 했다. 당시 을이었던 내 별명 또한 여시 코빼기였으니 별명으로는 나 역시 만만치 않았다.


이층으로 된 그 집 옥상엔 조그마한 옥탑방이 있었는데 당시 옥탑방엔 미대생이었던 언니가 살고 있었다. 손재주가 좋았던 언니는 시간이 날 때마다 취미 삼아 재료의 이름이 정확히 뭐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가늘고 투명하고 말랑한 재질로 된 재료를 꼬아 여러 가지 색 꽃반지를 만들 있었다.


그리고 가끔씩 옥상에서 마당에 나와 놀고 있던 나를 내려다보며 조용히 손짓해 언니가 만든 꽃반지들을 나누어주곤 했다. 그럴 때마다 빨강, 노랑, 초록 여러 가지 색색의 예쁜 꽃반지들을 끼고선 너무 좋아 엄마에게 조르르 달려가 빙글빙글 돌며 자랑을 늘어놓았다. 언니가 만들어 준 꽃반지는 다이아반지보다도 더 귀하고 소중했다.


어느 날 유치원에서 돌아와 마당으로 들어서자 샘쟁이가 자기 엄마 치마 한쪽을 잡고 몸을 꼬으며 "저 언니가 나는 반지 안 줘!"를 외치고 있었다.


아마도 대학생 언니와 나의 은밀했던 접선 현장을 언제 목격한 듯했다. "네 것도 언니가 만들고 있어, 곧 줄게"라며 언니는 난처하고 멋쩍은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난 기억하고 있었다.


"이거 너만 주는 거니까 예쁘게 잘하고 다녀." 했던 언니의 말을.


언니도 우리와 같은 을의 입장이었던지라 내게 더 마음이 쓰였던 걸까?

음식 솜씨가 좋았던 엄마는 전이나 김치, 밑반찬들을 하실 때마다 언니 것을 따로 챙겨 내게 자주 심부름을 보내셨는데 아마도 그래 서였던 것 같다. 오고 가는 음식 속에 끈끈해진 동지애 같은...


그런 샘쟁이에겐 일 년에 두어 번 찾아오시는 할머니가 있었다. 홍콩에 사셨던 탓에 홍콩 할라 불렀는데 이름만 들어서는 괴담에 나왔던 무시무시했던 같지만 키가 크고 시원시원한 성격의 할머니셨다.



샘쟁이가 자기 집으로 나를 놀러 오라 초대 아닌 초대를 하는 날은 일 년에 딱 두 번. 홍콩 할가 오는 날이었다.


나에겐 없었던 자기만의 핑크빛 공간으로 들어서자 온방 가득 홍콩 할가 사 온 갖가지 인형과 장난감, 학용품, 알 수 없는 꼬부랑 글자들이 적힌 그 나라의 과자들로 가득했다. 어린 나는 홍콩 할가 가져왔다는 선물들에 눈이 빙글빙글 무언가에 홀린 듯 빠져들었다.


그중 내 눈을 사로잡았던 것이 바비인형이었다. 우리나라 인형과 달리 쭉 뻗은 키에 기다란 팔과 다리, 약간 그을린듯한 피부와 화려한 옷, 액세서리에 화장까지. 너무나 완벽한 조합이 아닐 수 없었다.



정신없이 바비에 빠져있던 내게 샘쟁이가 바비인형을 들고 오더니 홀린 듯 앉아있는 내 얼굴 앞으로 쭉 인형을 내밀었다.


"갖고 놀아도 돼?"를 내뱉는 내게 "아니!"를 말하는 샘쟁이.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순간 샘쟁이 눈에 왕펀치를 날리고 싶던 찰나 "이거 너 가질래? 난 이런 인형 엄청 많아."라고 내게 말했다.


엄마는 늘 말씀하셨다. 세상에 공짜는 없고 친구라 믿었던 놈이 배신하기도 하는 게 세상이라고.


영화나 드라마에서 나쁜 놈도 친구라고 살려주고 뒤돌아서면 꼭 그놈이 주인공을 향해 달리던 장면을 많이 봐왔던지라 샘쟁이의 속마음이 뭔지 왠지 찜찜했다.


여시 코빼기던 별명답게 의심의 눈초리로 "왜? 왜 날 주려고 하는데?" 묻자 샘쟁이는 바로 "이 인형주께, 너 그 꽃반지 전부 다 나 줘, 바꾸자."라고 답했다.


그럼 그렇지,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엄마 말이 맞아.

날 보며 유혹하듯 하얀 이를 드러내고 환하게 웃고 있는 바비를 보며 3초 잠시 동공에 지진이 일었지만 내 약지 손가락에 끼워진 빨간 장미꽃반지를 내려다보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니, 안 바꿔, 나 바비 안 좋아해, 내 생일에 엄마가 나도 인형 사 준다고 했어, 나 먼저 간다."


지금 생각해도 여시 코빼기가 대견해지는 순간이었다. 어린 마음에 휘황 찬란 화려한 인형에 잠깐 마음이 흔들렸지만 그보다 언니가 만들어준 꽃반지가 내겐 무엇보다도 더 소중했다.


바비 인형은 세상에 수도 없이 많지만 꽃반지는 날 위해서 만든 나만 가지고 있는 거니까. 그 후로 홍콩 할가 올 때면 샘쟁이가 날 또 부르곤 했지만 더 이상은 샘쟁이만의 공간에 가지 않았다.


더 이상 선물을 잔뜩 사 오던 홍콩 할도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는 바비인형도 공주님이 살 것만 같은 핑크빛 샘쟁이의 방도 부럽지 않았다.


일찍이 깨달은 사실 하나.


부러우면 지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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