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곳으로 간다.

서른다섯. 이제야 독립합니다.

by 남다른 양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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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7일.

아침부터 인천공항에 도착한 나는 씩씩하게 탑승수속을 마쳤다. 가장 먼저 해야 하는 것은 면세점 쇼핑 물품을 수령하는 일. 이날만을 기다렸다는 듯 정말 알차게도 구입했던 화장품들을 받아 가슴에 안고는 오랜만에 보는 공항이 반갑기라도 한 건지 여기저기 둘러보면서 비행기 탑승을 위해 바쁘게 움직인다.


씁쓸함과 설렘.

그때의 난 이 두 감정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여행을 준비하면서 나의 긴급연락처에 적혀있던 엄마의 번호를 삭제했다. 그리고 그 자리는 남동생, 친척 언니의 번호로 대체되었다. 별거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35년간 당연했던 것들이 그렇게 하나둘씩 바뀌는 과정을 보기 시작한 나는 어색함과 씁쓸함이 느껴지기 시작했고 애써 그런 감정들에게서 벗어나고자 노력하고 있었다.


평소 앓고 있던 불안장애가 발목을 잡을까 걱정은 되면서도, 떠나는 것에 대한 설렘만을 생각하기로 하고 자리에 앉아서 탑승을 기다린다. 게이트에 있는 사람들은 연말 분위기에 들떠있고, 무언가 둥둥 뜨는 느낌이었지만, 나는 반대로 너무 지쳐있었고 차분해지려고 하고 있었다. 목적이 다른 여행이라 그렇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탑승을 하라는 알람이 뜬다.

이제 나는 낯선 곳으로 간다.




나리타 공항에 도착해 신주쿠로 이동하기 위해 NEX에 올라타 자리를 잡고 앉아 멍하니 밖만 쳐다본다. 그러다 갑자기 눈물이 나기 시작했는데 아마 둘이 오기로 한 곳을 혼자 온 것에 대한 서글픔. 바로 그 감정이었던 것 같다. 사실 일본은 엄마와 함께 여행을 하기로 계획했던 곳이었다. 엄마와 첫 여행이라 굉장히 기대하고 있었지만, 갑작스러운 엄마의 건강문제로 결국 성사되지 못했다.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혼자 이러고 있는 게 너무 청승맞아 보여 손으로 눈물을 슥슥 닦고는 '잘 놀다가야 엄마도 좋아하겠지.'라고 애써 생각하며 마음을 추스르곤 숙소로 향한다. 숙소에 무사히 도착해 침대에 벌러덩 누워서 잠시 생각한다. '이제 뭘 해야 할까?' 아무런 계획 없이 시작한 여행이었으니 갑자기 멍해졌다. 한참 생각을 하다가 짐을 챙겨 숙소 밖으로 나왔다.


우선 걷기로 한다.

발길 닿는 대로.


익숙하면서도 낯선 도쿄였으니 걷고 걷는다. 길을 잃기도 하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도 하지만 머리를 비우고 눈으로 보는 것에 집중한다. 와이파이는 길이 궁금할 때만 사용할 뿐, 음악도 듣지 않고 정말 걷고 보고를 반복한다. 계속해서 걷고 생각을 비우기 시작하니 여행은 자유로움이 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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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운 시간도 너무 좋았지만 가끔씩 멍해지고 했었는데, 그 이유는 바로 습관 때문이었다.


좋은 것이나 예쁜 것이 있으면 사진을 찍어 엄마와 공유하고 나중을 약속하는 것, 출장이나 여행을 가게 되면 일정을 마친 저녁에는 항상 엄마와 통화를 하면서 새로운 경험이 있다면 서로 이야기를 하고 밥은 먹었는지, 잠은 잘 자는지 소소한 것들을 나눴던 습관. 통화를 마무리할 때면 평소에 표현이 없던 엄마가 '조심히 돌아와 우리 딸. 보고 싶어 눈물이 나네! 집이 너무 텅 비었어!'라고 장난스럽게 말해주었던 그런 것들.


생각 없이 나눴던 이야기와 전화통화. 그 작고 소소한 모습들이 이렇게나 큰 공허함을 주게 될 것이라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 그래서 그런지 여행 기간 내내 하루를 마무리하는 시간은 오히려 맥주 한잔 하고 빨리 뻗어버리는 게 제일 나은 선택이기도 했다.


경험해보지 못했던 일을 겪게 되면 생각조차 못했던 일을 너무 많이 만나게 된다.


엄마는 나에게 많은 추억을 만들어주지 못했던 것을 미안해했는데, 오히려 나는 소소한 추억이 너무 많아서 사실 지금도 힘들다. 돌아보면 세상에 오직 둘. 우리는 서로를 위해 살아왔으니 너무 서로를 애틋해했던 것 같다. 아마 앞으로는 엄마는 하늘에서. 나는 여기서 서로를 더 그리워하며 다시 만나게 되는 날만 기다리고 있겠지 싶다. 결국 이게 현실이니깐.


여행은 당연했던 것들이 없어지는 과정과 내 앞에 있는 놓인 현실을 직시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도쿄에서의 시간은 무거움보단 자유로움이 더 많았던 시간이었다. 점점 여행의 즐거움을 찾기 시작한다. 연말이라 도시 자체가 예쁘고 사람들도 활기차니 오랜만에 나도 활기를 되찾는 느낌이었다. 서울에 있을 때보다 잘 먹고, 잠도 평소보단 오래 잘 수 있었다.


도쿄 일정을 마치고, 오사카로 이동해야 하는 날이 다가왔다. 평소보다 컨디션도 좋으니 마음도 조금씩 안정되고 여행이 즐거워지고 있었기에 아무런 걱정 없이 공항으로 향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내 불안장애가 나를 다시 바닥으로 떨어지게 할지를.


멘붕의 시작이 되었던 그날.

사건이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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