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인생 마라톤 : 2020 뉴욕 시티 버츄어 마라톤 다섯 번째 페이지
5:32 AM 알람이 울리기 전에 먼저 일어났다. 열어놓고 잔 창문 틈으로 밤벌레 소리가 들리는 아직 어두운 아침 새벽이다. 화장실로 가서 세수를 하고 양치를 한다. 날씨를 체크하고 얼굴에 선스크린을 바른다. 오늘 아침은 긴 바지 대신 짧은 바지를 입고, 무릎까지 올라오는 짝짝이 색 양말을 꺼내 신는다. 싱가포르에서의 추억 때문에 짝짝이 색 양말을 보고 웃음이 난다. 머리를 묶고 오늘은 그 묶은 머리를 정성스럽게 땋아 본다. 뭔가 비장하다. 키친으로 내려와서 커피를 만들어 마시고, 달리기가 끝나고 마실 물을 정성스럽게 물통에 담는다. 날씨를 보니 비가 온다는 아침이다.
Rain or Shine, Show up. 비가 와도 해가나도, 무슨 일이 있어도, 마주한다. 내가 꼭 잡고 가는 나의 문장.
7:06 AM 공원에 도착. 스트레칭을 한다. 기분 좋은 텐션. 아직 아침 공기가 차다. 저번 주에는 익숙하지 않던 하이드레이션 팩이 오늘은 등에 딱 붙어 있다. 달리기 전 셀카를 찍었으니 달릴 준비 완료.
처음은 그렇게 편하고 쉽게 천천히 시작한다. 비가 한두 방울씩 떨어진다. 아직 빗방울이 크지는 않다.
매주 같은 곳을 달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주 다른 나를 만난다. 이번 주 아침 저번 주와 다르다. 저번 주 보다 더 긴 거리를 달려야 하는 부담감보다는, 가보지 않은 길을 가보겠다는 설렘에 또 같은 곳을 그렇게 달린다. 고작 일주일이 지났는데, 벌써 가을이 왔다고 말해주듯 색깔이 변해있다. 같은 곳이지만, 시간이 지난 것을 알려 주기라도 하듯 그렇게 나무의 색깔은 이미 변해 버렸고, 아침의 온도도 습도도 다 다르다.
가보지 않은 곳에 대한 두려움. 매주 같은 호수를 달린다. 이미 나에게 익숙한 코스 그리고 거리이다.
그러나 매주 다르게 느껴진다. 그건 아마도 매주 달려야 하는 거리가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이미 알고 있는 그 익숙 한 코스도 갑자기 낯설어져 버리는 그렇게 긴 거리를 달려야 하기 때문이다. 호수 한 바퀴를 달리고 나서야 ( 6마일 ~9킬로 정도 거리) 몸이 풀린다. 두 바퀴를 달려 나간다. 이런저런 생각에 노래를 들을 정신도 없었다. 알고 있는 코스임에도 불구하고, 다시 돌아온 그곳을 지나가는 내가 다르니 모든 게 다르게 보인다. 처음 지나갈 때 보이는 것들 그리고 다음번에 지나갈 때 보이는 것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들.
가보지 않은 곳에 대한 두려움은 내가 알고 있고 믿고 있던 것들에 깨짐에서 그 두려움도 과감히 깨지기 시작한다. 두려워할 필요 없다. 모든 것들 배워나간다고 생각하면, 크게 두려워할 필요 없다. 오늘 또 이렇게 달리면서 배운다.
달리면서 만나는 사람들. 매주 토요일 같은 시간대에 달리다 보니 나와 같은 시간대에 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매주 만난다. 그리고 새로운 사람들도 지나쳐 간다. 달리는 동안 눈이 마주치면 아주 크게 웃어준다. 그리고 손으로도 인사를 한다. 나를 보고 먼저 웃지 않아도, 내가 먼저 웃으면 그 웃음은 나에게 다시 돌아온다. 그래서 그렇게 웃는다.
매주 만나는 미국 할아버지 두 분, 달리면서 2번을 마주쳤는데 첫 번째는 오늘 달리기 잘해! 두 번째 마주칠 때는 좀 더 힘내서 오늘 달리기 잘 마쳐하며 더 크게 응원을 해주신다. 그래서 더 크게 웃으면서 달린다. 몸이 풀려가는 내가 좋아하는 구간을 달릴 때쯤 딸, 아들, 강아지랑 산책을 나온 아빠를 만났다. 내가 달리는 옆을 따라서 딸이 같이 달린다. 아이의 속도를 맞혀서 뛰어간다. "와 정말 빠른데, 너 몇 살이야?" 한 손에는 조그만 무지개 비개를 들고뛰고, 다른 한 손으로 손가락 4개를 들어 보이면서 자신감이 가득 찬 목소리로 나한테 말한다. "나는 4살이에요!" "와우! 너무 건강하게 잘 달리는데, Keep going! Keep going! 계속 달려보자. 우리 아들도 4살인데 너 너무 멋있다."
얼굴에 미소가 한가득이던 꼬마 아가씨를 지나서 계속 달렸다. 어느덧 세 바퀴를 지나 달려가려고 하는데 비가 계속 내린다. 다행히 나무가 하늘을 가려주고 있는 구간이라 비에 많이 젖지는 않는다. 지쳐 가려고 하는데 아까 만났던 가족을 다시 만난다. 비가 와서 인지 아빠가 어깨 목마를 하고 빨리 걸어간다. 그리고 그 꼬마 아가씨 큰소리로 내가 아까 했던 말을 다시 해준다. Keep going! Keep going! 웃음이 난다. 내가 해줬던 말이 내가 필요할 때 다시 돌아왔다. 신기하고 고맙다. 그렇다 내가 생각지도 못하게 했던 행동과 말들이 나한테 돌아올 때가 있다. 나의 말과 행동들을 더 신중히 이 세상에 내려놓아야 한다.
비가 오는 날도 잘 달리려면, 비가 오기 전에 시작해서 달리면 된다. 달리기가 끝나면 비가 오길 바라면서 달리면 된다. 이미 달리기가 시작됐으니, 끝내고 돌아오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비가 오는데 시작해야 하는 부담이 적어진다. 달리는 도중에 비가 오면 비를 맞으며 달린다. 이미 시작했으니 끝을 내야 한다. 다행히 비가 많이 오지 않아서 미끄럽지 않았다. 오히려 해가 쨍쨍 나는 날보다 더 수월하게 뛰었던 것 같다. 날씨가 좋은 날 만 달릴 수 없다. 날씨가 좋지 않은 날도 달려야 한다. 괜찮지 않은 날을 잘 보내야. 괜찮은 날이 오듯이 그렇게 비가 오는 날도 열심히 뛰어 본다. 비 오는 날도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잘 달리는 것. 그게 비 오는 날도 잘 달리는 비결이다.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데로 내 속도와 마인드 컨트롤을 잘하며 끝까지 달리면 되는 것이다. 아무리 거창한 계획을 세우고 나가도, 상황이 변하면 그에 맞는 판단을 하면서 말이다.
15.5 마일 24.96 킬로이다. 2 시간 41 분을 쉬지 않고 달렸다. 매주 조금 더 길어지는 거리를 달리면서 그저 감사하기만 하다. 건강한 몸과 점점 단단해지는 마음. 거리가 늘어날수록 마음가짐이 더 중요할 거라는 생각이 든다. 조금 더 달려서 16 마일을 채울 걸 하는 생각은 절대 들지 않는다. 나 오늘 또 내가 달릴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서 달렸다. 오늘 또 그렇게 새로운 기록이 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