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는 이런 딸이 종종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그런 사람이 없어요. 따님뿐이에요. 나도 딸이 하나 있는데, 내 딸은 이렇게 해주려나 할머니는 복 받으셨어요"
대학병원 신경과 교수는 모니터를 보던 시선에서 휠체어에 앉아있는 할머니에게 돌리며 말했다. 교수의 시선이 향한곳은 할머니 등뒤로 휠체어를 잡고 있는 할머니의 딸이었다. 청바지를 입고 검은점퍼를 입은 그녀는정수리로 흰머리가 보였지만 무심한듯 머리를 묶고 있어었다. 그녀가 대학병원 신경과를 방문한 지도 벌써 7년이 되었다. 그녀의 세계가 멈추어 버린 그 순간에도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갔다.
평범한 일상이 의미로 남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특별한 경험은 의미를 줄 수 있다. 그녀는 생각한다. 특별한 일은 그저 경험으로 그치면 좋겠다고. 나쁜 일이 특별할때는 더욱 그렇다. 나쁜일인데 그 특별한 경험이 삶으로 이어지는 것은 얼마나 많은 헌신과 노력 인내가 필요한지 알기 때문이다. 특히 환자를 돌보는 일은 더욱 그러하다.
뇌경색으로 쓰러진 그녀의 엄마는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게 되었다. 눈의 초점을 맞지 않아 사물을 제대로 잡을 수 없게 되었을뿐더러, 왼쪽 손발의 힘도 빠져 버렸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걷기 연습을 하다가 넘어져 왼쪽 고관절이 부러지게 되었고, 인공고관절 수술을 하고 , 더 이상 걸을 수 없는 몸이 되었다.
그런 엄마를 혼자 둘 수 없었던 그녀는 엄마를 돌보기로 한 것이다. 사실 7년이나 되는 긴 세월 엄마를 돌보고 있을 거라고 본인도 생각하지 않았으리라. 그저 1년이나 2년 엄마를 돌보면 혼자서도 생활할 수 있지 않을까 안일하게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엄마의 상황은 좋아지지 않았고 계속 나빠졌다. 그렇게 7년이 지난 지금은 엄마의 몸은 더 안 좋은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네가 엄마 못 본다고 하면 엄마는 요양원 모셔야지"
그녀의 언니에게 엄마를 맡기고 잠시 휴가를 갖고 싶었지만 돌아온 대답은 냉정하기만 했다. 언니와 전화통화를 하던 그녀는 전화기 너머로 무심하게 하는 말을 이해는 하면서도 상처 받았다. 혼자 버려질 엄마의 미래가 눈에 그려져서일 것이다.
"늘 미안하다"
그녀의 언니도 속마음은 엄마를 돌보는 동생에게 늘 미안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삶을 포기하고 엄마를 돌보기에는 현재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삶의 영역이 너무 소중했다. 단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곳이 자신의 삶에 가장 의미가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환자용전동 침대에 누워 보드라운 빨간 이불을 입까지 올려 쓰고 잠을 자려고 하는 엄마에게 그녀가 물었다.
"엄마 한 10년은 더 살다가 돌아가셔"
"아니"
엄마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럼 5년?"
"아니"
"그럼 3년"
"아니"
"그럼 몇 년?"
"수건 있냐?"
머리맡에 둔 수건을 눈의 초점도 없이 손만으로 더듬거리렸다. 보다 못한 그녀가 배개옆에 놓인 수건을 흐느적 거리는 손에 들려주자 입을 쭉 내밀며 입안에 고인 침을 닦았다. 침을 닦는 엄마를 보며 그녀가 물었다.
"그럼 일 년?"
"당장 죽어야재"
일 년도 싫다며 고개를 흔들던 병든 엄마는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고통이었다. 정말 죽고 싶지만 또 살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인데 그녀는 엄마에게 상냥하게 말했다,
"엄마 내가 60 될 때까지 살아, 아니 내 몸이 엄마를 돌 볼 수 있을 때까지는 살아"
그때서야 엄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살을 파는 고통을 참고 살아야 하는 것이 죽기 보다도 싫었지만 그래도 살아갈 의미를 막내딸이 주고 있었다.
사람은 누구나 의미 있는 존재가 되고 싶어 한다. 의미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희생과 헌신, 그리고 상대를 향한 사랑의 시간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