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편지

스승에게 보내는 편지

by 해질녘

페이지 21. 단순하지만 누를 길 없이 강렬한 세 가지 열정이 내 인생을 지배해 왔으니, 사랑에 대한 갈망, 지식에 대한 탐구욕, 인류의 고통에 대한 참기 힘든 연민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열정들이 마친 거센 바람과도 같이 나를 이리저리 제멋대로 몰고 다니며 깊은 고뇌의 대양 위로, 절망의 벼랑 끝으로 떠돌게 했다. -버트란드 러셀 [인생은 뜨겁게] (사회평론, 2014)

누군가에게 편지를 보내고 받고 싶을 때가 있다. 스마트폰이나 이메일이 아니라 서로에게 편지를 교환하며 서로의 안부를 묻고 싶을 때가 있다. 종이에 서걱거리는 느낌과 편지지를 따라 흘러내리는 글씨들이 내 감정과 같이 흘러내린다는 것이다.


편지를 쓴다는 것은 그 사람이 나와 가까운 거리에 있지도 않고 나와 오랫동안 정신적으로 교류를 해 온 사람만 가능할 것이라는 나의 착각이 오히려 더 펜을 들고 편지를 할 수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나의 아버지에게, 나의 선생님에게, 나의 아내에게, 나의 아이들에게 편지를 쓸 수도 있었지만 나는 나와 정서적으로 교류할 수 있는 편지를 쓰고 싶었다. 정신적인 스승이나 나의 글에 글로 답해줄 수 있는 사람에게 편지를 보내고 싶었다. 그런 분들 중에 한 분이라고 할 수 있는 구본형 선생님에게 편지를 쓴 적이 있지만 답장은 받을 수 없었다. 마음 편지를 읽다가 이번 기회에 그 편지를 다시 읽어보았다.



오늘 선생님의 책을 다시 펼쳐 보았습니다. 스티븐 킹의 저서 빌리 서머스에서 조지프 캠벨이라는 이름이 낯설지가 않았던 이유가 선생님의 책 속에 있었는데 저는 새까맣게 잊고 있었습니다.


연필로 줄을 긋고 동그라미를 친 흔적들이 여전히 남아 있었는데 제 머릿속은 하얀 백지처럼 모든 문장이 낯설게만 느껴집니다. 너무 급하게 읽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다시 한 페이지 한 페이지 곱씹어가며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이제야 드는 것은 저의 어리석음 때문이겠죠.


선생님의 책을 제대로 읽지 않고 덮어버린 저의 과오가 오늘의 부족한 저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은 제 모습이 부끄러워도 선생님이 계시지 않으니 그 부끄러움을 감추고 싶어도 이제는 그 슬픈 그리움만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책으로만 만난 선생님 앞에 글로써 다시 만나고 싶습니다.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그 글로 다시 만나서 잊히지 않는 그 감정들을 쏟아내고 싶습니다. 선생님과 같은 시대를 살아왔으며 선생님의 책을 읽고 많은 깨달음을 얻었던 지난 시간들이 지나 사십 대 중반이 된 저의 모습은 제가 바라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년 전부터 읽었던 선생님의 책들이 책장 속에 꽂혀 있다가 이제야 다시 꺼내 읽었습니다. 그때의 느낌과 지금의 느낌은 전혀 다르게 다가왔습니다. 오늘따라 선생님의 책과 문장이 더 깊이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이 다시 내려오신 것처럼 오늘부터 선생님과 함께 책을 펼쳐보려고 합니다.


10. 고전은 오래된 책이다. 그 긴 세월을 지나는 동안 퇴색되지 않을 만큼 버틸 수 있었던 인류의 근육이며 신경체계인 것이다. 그러나 고전은 단지 오래된 책이 아니다. 고전은 '진실에 진실한 작가'들이 쓴 책이다. 이것이 조지프 캠벨식 정의다. 진실에 진실하다는 것은 불완전한 인간을 사랑할 수밖에 없게 만들어준다. 고전은 완전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완전한 인간은 우리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 그것은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불완전하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12. 고전은 바로 불완전한 인간에게 작가가 진실한 언어의 창을 던지는 것이다. 깊은 상처를 입힌다. 그것은 다시 태어나게 하는 사랑의 창이다. 불완전한 인간을 찔러 그 피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것이다. 토마스 만은 이것을 '에로틱 아이러니'라고 불렀다. 고전은 나를 바꾸는 지독한 유혹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삶에 기쁨을 쏟아주는 위대한 이야기다. 내면의 가치를 잃었다고 느낀다면 바로 고전을 읽을 시간이다. 삶의 황홀을 맛본 지 오래되었다면 내 영혼을 위해 바로 지금이 고전을 읽을 시간이다.


구본형 내 삶의 터닝포인트 18. 조지프 캠벨의 책들은 신화를 원래 좋아하던 나에게 영웅의 여정을 내 삶에 접목시켜 보라는 아이디어를 주었다. 신화라는 집단 무의식을 통해 내 삶 속에서도 영웅을 일으켜 세우는 작업을 시도해 보라는 것이다. 영웅의 여정은 여러 단계가 있지만 대개 소명을 받고, 조력자를 얻어 시련을 이겨낸 다음 보상을 가지고 집으로 귀환하는 코스를 보인다. 예를 들면 오디세우스가 고향인 이타카로 귀환하는 신화를 읽어보면 여러 난관이 그의 앞길을 가로막는다. 원하는 결과를 성취하는데, 그 과정은 결코 만만하지 않다. 그러나 중간중간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서서 앞을 향해 걷도록 신화는 우리를 선동한다는 것을 캠벨은 알려주었다.


113~114페이지 그대의 아리아드네의 실을 찾았나요?


네가 따르는 한 가닥 실이 있지.

변화하는 것들 사이를 지나는 실.

그러나 그 실만은 변치 않아.

사람들은 네가 무엇을 따라가는지 궁금해하지.

너는 그 실에 대해 설명해야 해.

그렇지만 그 실은 다른 사람들 눈에는 잘 보이지 않아.

그 실을 꼭 잡고 있는 한. 너는 절대 길을 잃지 않아.

살다 보면 슬픈 일도 일어나고,

사람들은 상처를 입거나 죽기도 하지.

너도 고통받고 늙어갈 테지.

네가 무얼 해도 시간이 하는 일을

막을 수는 없어.

그래도그 실을 꼭 잡고 놓으면 안 돼.

- 윌리엄 스태포드 <삶이란 어떤 것이냐 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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