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어른이 되어가는 중입니다]
p.s 누릴 수 있는 행복을 '어른'이라는 이유로 놓치고 있는 우리에게 바칩니다.
소소한 행복이 주는 기쁨과 아늑함을 모두가 함께 누릴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
일에 미쳐 살았던 때가 있었다. 하루라도 더 젊을 때 경험하고 배워야만 업계에서 살아남는다고 줄곧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오곤 했다. 그리고 나조차도 이를 납득하고 더 쉬지 않고 '조금만, 조금만 더'를 외치면서 버티면 더 성장할 수 있다고 믿었다.
힘들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에너지가 100% 있다면, 120%를 쓰며 살았다. 몸을 혹사시킨 결과는 뻔하듯 과로에 번아웃이 왔다. 짙은 다크서클이 생겼고, 길을 가다 땅이 꺼지는 블랙아웃도 경험했다. 의사는 내겐 "빨리 죽고 싶으세요, 환자분?" 때때로 경고해 왔다. 그때는 의사가 무례하다고 생각했다. 세상에 빨리 죽고 싶은 사람이 얼마나 있다고, 이제는 괴롭힐 사람이 없어서 의사도 나를 괴롭힌다고 합리화를 했다. 내 몸이 던지는 경고는 무시하고 의사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들을 만큼. 그리고 그 경고들은 결국 쌓여 내 모든 길의 앞길을 막았다.
열정은 삶을 살아가는 부스터라면 휴식은 안전벨트가 아닐까? 속도를 조절해 주는 브레이크는 과한 열정을 막아주기도 하지만, 소중한 일상을 지켜내는 데도 큰 역할을 한다. 내게는 이러한 안전장치에 대한 점검이 부족했던 것 같다.
번아웃이 심하게 왔을 때 내일이 오는 게 기대되지 않았다. 때때로는 하루의 기억이 통째로 사라지기도 했다. 반복적으로 그냥 똑같은 날의 연속이라는 생각만 들었다. 거기다 일상이 된 소화 불량과 두통까지. 그러나 죽고 싶을 만큼 우울한 건 아니었다.
그저 반복된 일상에 지쳐갔고, 내일이 오지 않기를 빌기도 했었다. 딱히 사는 게 즐겁지 않다고 느꼈던 것 같다. 그중에는 때때로 작은 행복과 기쁨이 있었음에도 흠뻑 만끽하지 않았다. 정말로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든 적은 없다. 다만, 지금 생각해 보면 일상적 불행을 경험한 것 같다.
작지만 매일이 불행한 상태는 오히려 큰 불행보다 더 불행하게 느껴졌다. 큰 행복을 바란 건 아니다. '피식'하는 작은 웃음이라도 필요했고, 그걸 맘껏 누릴 조그만 여유가 필요했던 것 같다.
생각보단 우린, 스스로 언제 가장 불행한 지를 잘 안다. 다만 이상하게 그 반대는 어렵다. '언제 행복하지?', '언제 행복했지?', '뭘 하면 행복할까?'를 대개 어려워한다. 다만 추측은 한다. '합격을 하면….', '돈을 많이 벌면….', '여행을 떠나면….' 행복하겠지라고.
사람들은 대개 큰 행복을 좇고 목표를 만든다. 그리고 그것을 이루면 성공 혹은 행복, 행운이라고 했던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의문이 생긴다. 과연 '큰 행복만 행복인가?', '작은 행복은 행복이 아닌가?'라고. 큰 행복만 행복이라는 생각에, 작은 행복을 놓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게 우리가 행복을 대하는 방식으로, 일상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매일 같이 불행을 쌓고, 언젠가는 그걸 다 해결해 줄 거대한 행복이 올 거라고 기대하는 것.
그러나 바뀌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게 아니다. 다만, 불행에 민감한 만큼 행복에 민감해 보는 건 어떨까? 작은 행복, 소소한 행복이 주는 벅찬 감정과 평온한 일상을 사실 우리가 가장 바라고 있던 것은 아닐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진정한 어른은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만큼이나 '행복'을 누릴 줄 아는 사람이 아닐까? 행복의 크기는 본인만 가장 잘 알 수 있다. 행복의 크기보다는 '행복' 그 자체에 집중할 수 있는 어른이 되어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