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시간을 돌려줬으면 좋겠어!!"
첫째가 7살이던 어느 날 밤, 대성통곡을 하는 아이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그러했다. 하루종일 놀고도 더 놀고 싶은 마음. 그때의 그 마음은 어린 시절의 내 마음이기도 했을까. 하루에 주어지는 공평하고도 유한한 시간 안에서 좋아하는 일만 하고 싶은 건, 아이나 어른이나 모두 마찬가지일 것이다. 다만 점점 어른이 되어가면서 체면과 체념, 그 어딘가에서 떼를 쓰지 않는 방법을 터득해 갈 뿐.
“엄마, 놀 친구가 없어요…”
첫째가 초등학교 고학년에 접어들자 친구들은 다니는 학원의 수가 늘어났다. 늦은 저녁 무렵에서야 약속 잡는 일이 가능했고, 취침 시간이 빠른 편인 첫째는 점점 약속을 잡는 일이 어려워졌다. 1학년이었던 둘째도 크게 다르지 않은 상황이었다. 하교 후 놀이터에 들렀다가 각자의 스케줄에 따라 사라지는 친구들. 친구들과 어울리기 위해 학원을 보내야 하는 걸까. 앞으로 더욱 짙은 무게로 따라다닐 사교육비의 그림자 앞에서 흔들렸고 혼란스러웠다.
"아니, O팀장 왜 그만뒀대요?"
"애들을 위해서 시간 좀 보내려고 한대요"
"아니, 애들을 위해서 학원비를 더 벌어야지!!! “
크게 친분이 없던 회사 동료의 말은 퇴직 후 친한 가족끼리 만난 식사 자리에서 듣게 되었다. ‘아,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나도 모르게 속으로 웃음이 터져 나왔지만 틀린 말도 아니다. 애들을 위해서 부모가 해야 하는 리스트에 아직 넣지 않은 ‘학원‘이라는 단어가, 누군가에게는 1순위 일수도 있다는 것. 정답은 없다. 각자 옳다고 생각하는 방법과 방향으로 나아갈 뿐이다.
많은 문제들이 뒤엉켜 올라올 때는 우선순위를 정해야 한다. 우리에게 교육보다 중요한 건 아빠와 아이들의 부족했던 교집합의 시간을 늘리는 일이었다. 지금껏 회사에 올인했던 남편과 육아를 도맡았던 나는, 가족끼리 어딘가로 놀라갔던 적이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연휴로 쉴 수 있는 명절과 여름휴가는 대부분 시댁으로 향했으니까. 그 벌어진 빈틈의 시간을 촘촘히 메우고 싶었다.
어떤 분은 지지해 주셨다. 자신도 아이들이 크고 나니 함께 못했던 시간들이 너무 아쉽다고. 멋진 결정이라고 응원해 주셨다. 워킹맘으로 누구보다도 성실하고 열심이셨던 분이기에 그런 응원이 더욱 와닿고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그분의 자녀들은 그런 엄마의 뒷모습을 보고 잘 크겠지. 자식을 위해서 부모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크기와 방향은 모두 다르니까
지금 가장 중요한 건 함께하는 시간이라는 것. 그것이 결론이었다. 당분간은 수입이 일정하지 않을 터이니 지출을 줄여야 한다. 그리고 대담하게 사교육비 항목을 잘라냈다. 가족이 함께 즐길 새로운 환경과 아이들이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는 곳. 방과 후 수업과 영어학습 지원, 스포츠 체험 활동들이 무료로 제공되는 시골의 작은 학교들의 이점에 끌릴 수밖에 없었다.
작은 다이어리 메모란에 몇십 개의 학교 이름을 적어 나갔다. 지역과 궁금한 곳은 직접 전화를 걸어 문의했고, 하나둘씩 학교의 이름을 지워나갔다. 학교와 이사를 결정했고, 다니던 태권도와 피아노, 축구를 그만 두었다. 불과 2주만에 내린 결정이었다. 우리 집 가계부에도 언젠가는 사교육이란 항목이 다시 들어갈 날이 올 것이다. 충분히 마음껏 즐기고 돌아올 때까지. 당분간 사교육비는 안녕이다.
‘저의 딴짓이 지금의 저를 만들었습니다’ 좋아하는 최재천 교수님의 책 <최재천의 공부>에서 내가 밑줄 그은 부분이다.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 멋진 직업을 갖기 위해 지금부터 부지런히 선행하며 공부하는 것만이 정답일까. 나는 늘 그런 의문을 품고 있었다.
물론 아이들의 인생에서 공부는 중요하다. 그렇지만 공부 자체보다도 공부의 즐거움과 자신의 꿈을 향해 걷는 수단으로써의 공부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한 마음과 목표가 생기기 전까지, 다양한 경험과 무수한 딴짓의 시간을 갖는다면. 민들레 홀씨를 날리듯 스스로 유의미한 질문을 만들고 던져 볼 기회가 있기를 바랐다. 언제 어디에서 뿌리를 내릴지는 모르지만, 여러 가능성을 가진 홀씨들을 발견하고 날려보는 시간을.
교육에 대한 현실적인 조언들에 조급함이 밀려올 때면 우주에서 조망하듯 아이들 일생의 전체를 그려본다. 인생을 긴 선으로 본다면, 지금 이 구간은 어디쯤인지. 아직은 조금은 느긋하게 생각해도 괜찮을 거라고.
우선순위가 정해졌다면 뒤돌아보지 않을 것.
다른 것들에 아쉬워 말 것.
당분간은 사교육비 제로로 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