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여행 13화
마침내 호찌민에 도착했다. 두 달 전 처음 호찌민에 갔을 때와는 달리 오토바이 소음이 하나도 거슬리지 않았다. 오히려 북적대는 대도시 분위기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다들 어쩜 그리 영어를 잘하고 친절한지 다니는데 아무 불편이 없었고, 눈치 빠른 오토바이 기사들은 내가 두리번거리기만 해도 어딜 가려는지 알아채고 방향을 가르쳐줬다.
월남의 수도였던 호찌민에는 관광명소가 구찌터널, 통일궁, 전쟁박물관처럼 베트남 전쟁 관련된 것들뿐이었다. 전쟁 같은 덴 관심 없었지만 다른 뾰족한 구경거리가 없다보니 전쟁박물관엘 가게 됐다. 베트남전에서 사용된 무기와 미군의 잔학상을 고발하는 사진들이 전시돼있었는데 사진들은 보기에 고통스러웠다. 뚜얼슬랭이 떠올랐다. 뚜얼슬랭에서 나는 왜 그런 참혹한 사진들을 보여주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곳엔 나처럼 가이드북의 꼬임에 넘어간 관광객들뿐이었으므로, 이 가난한 나라에서는 이런 끔찍한 걸 다 관광 상품화하는구나 싶어 혼자 진저리를 쳤다. 그런데 전쟁박물관에 이르러서야 근현대사에 대한 그들의 태도가 나와 다르다는 걸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학교에서 근현대사를 배워 본 적이 없다. 교과서에 근현대사 부분이 있었지만 배우지 않았고, 선생님은 그에 대해 한 두 마디 하는 경우에도 시험문제에는 나오지 않는다는 말을 꼭 덧붙였다. 내게 근현대사는 역사가 아니었다. 근현대사는 역사 축에도 끼지 못하는, 파고다 공원에 모여 앉은 노인들의 퀴퀴한 시시비비 같은 거였다. 직접 경험한 1987년 6.10항쟁 이후의 역사에 대해서는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지만, 항쟁의 무대였던 서울에 6.10기념관을 세울 수 있다는 생각까지는 하지 못했다. 경복궁, 비원, 남대문 같은 것들만 보고 기념할만한 가치가 있는 역사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호찌민의 전쟁박물관에서 정신이 들어 생각해 보니, 한국과 인도차이나 모두에게 20세기에 겪은 전쟁과 그 전쟁을 극복해나가는 과정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역사가 아닐 수 없다. 게다가 한국전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 아닌가. 문득 근현대사를 모두 건너 뛴 채 경복궁을 거닐며 전통 운운하는 한국인의 모습이 공허하다 못해 기괴하게 느껴졌다.
호찌민의 2월은 덥고 습해서 살살 다녀도 온 몸이 땀에 젖었다. 숙소에 들어가 샤워를 하고 나오니 고맙게도 해가 지고 있었다. 퇴근길의 오토바이들은 차도 뿐 아니라 인도까지 점령하고 달렸다. 길을 건너려다가 오토바이들에 압도돼 서있자니, 한 아주머니가 내 손을 꼭 잡고 같이 길을 건너 주었다. 시원한 바람과 화려한 빌딩 숲과 시민들의 친절에 도취돼 밤거리를 쏘다녔다.
거리에는 노천식당이 늘어섰고 식당마다 저녁시간을 즐기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 속에 섞여 하노이분차를 시켰다. 상추, 고수, 소스에 담긴 고기, 차가운 면이 각각 그릇에 담긴 채 나왔다. 이것을 어떻게 먹는 것일까? 옆자리를 곁눈질해 보았다. 옆 사람은 상추쌈을 제일 밑에 깔더니 그 위에 면과 고수를 올리고 마지막으로 고기를 얹어 먹었다. 일종의 상추쌈인 것이다. 우리도 고기를 쌈에 싸먹으면서 고기의 누린내를 잡아줄 향이 강한 야채와 달고 짠 맛을 내는 소스를 넣는다. 고수는 우리의 파, 마늘, 고추 대신이고 소스는 우리의 쌈장 대신인 것이다. 그렇다면 면은? 밥 대신이다. 하노이분차에 면은 실 뭉치처럼 떡 진 덩어리인데 그것을 손으로 뚝뚝 잘라서 쌈에 올렸다. 나로서는 면을 쌈에 올려 먹는 것이며, 젓가락으로는 잡을 수 없도록 떡 지게 조리하는 게 신기하기만 했다. 면은 한국에서도 일상적인 음식재료라 면에 대해 잘 안다고 믿어왔기에 더더욱 면의 작은 일탈과 변신에도 놀라움이 컸다. 베트남은 면의 종류와 조리법이 엄청 다양해서 식사 때마다 면의 가능성을 재발견하게 됐다. 면뿐이 아니다. 베트남에선 토마토 파인애플 오이 바나나도 국과 구이로 새로운 면모를 뽐냈다. 물론 맛있었고, 그것들을 날로만 먹어야 되는 줄 알고 살아온 무지한 세월이 원망스러웠다.
시내구경을 마치고 숙소로 향하는데 40대 여자 둘이 말을 걸어왔다.
“저기 그 신발 어디서 샀어요?”
“이거 한국에서 샀는데요.”
“아, 그렇구나. 한국에서 왔어요? 우리는 인도네시아에서 왔는데.
여자들은 처음 보는 사이인데도 스스럼이 없었다. 누군가 나를 스스럼없이 대해주는 게 나쁘지 않았다. 낯선 곳에서 할 일 없이 혼자 다니느라 친구에 굶주려 있었던 것이다.
“제 조카도 다음 달에 한국에 간호원으로 가요.”
“간호원이요? 한국에서 외국인이 간호원을 한다구요?”
내가 되묻자 여자가 따지듯 말했다.
“왜요? 아시아에서 일하러 온 사람들 못 봤어요?”
“봤지요. 근데 간호원으로 일하는 경우는 없는데....... 조카가 한국말을 잘 하나요?”
“그럼요. 한국어 공부를 했죠.”
“네~에.”
“호찌민에 온지는 얼마나 됐어요?”
“오늘이 이틀짼데 내일 한국에 돌아가요.”
“몇 시에 가는데요?”
“밤늦게요.”
“베트남엔 처음이에요?”
“네. 캄보디아랑 라오스를 거쳐서 왔어요.”
“캄보디아는 어때요?”
“좋아요.”
“어떤 점이?”
여자가 정색을 하며 물었다. 별 뜻 없는 질문이라고 여겨 별 뜻 없이 대답했는데, 당황스러웠다.
“....하하 뭐 특별히 좋았던 건 아니고..... 그런데 어디 가세요?”
“우리는 집에 가죠. 아저씨가 여기 살아서 우리는 여관에 안 있고 아저씨 집에 있어요.”
할 말이 끊기자 처음에 그들이 신발에 관심을 보였던 게 떠올랐다.
“이 신발 크록스에요.”
그러나 그들은 신발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화제를 돌렸다.
“내일은 뭐해요?”
“별로 할 일 없는데요.”
“그럼 내일 우리 집에 아침 먹으러 올래요?”
여행을 하기 시작한 이래 늘 다음 날 뭘 할지가 고민이었다. 여행 내내 오라는 데도 갈 데도 없는 처지였던 것이다. 그런데 두 달 만에 처음으로 누군가와 만날 약속을 하게 된 것이다. 당연히 기쁜 마음으로 초대에 응했다. 다음 날 아침 그 자리에서 다시 만나기로 하고 돌아서는데, 문득 그들이 피노키오에게 접근했던 두 명의 사기꾼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피노키오의 사기꾼들이 그렇듯이 활달했지만 친절한 인상은 아니었다. 차림새로 보아 크록스에 관심을 가질 타입이 아니었고 실제로 아무 관심도 없었다. 아무래도 신발을 화제 삼아 일부러 나한테 접근한 것 같았다. 나는 그들에 대한 의심과 불안과 걱정에 휩싸였다. 약속을 취소하고 싶었지만 그들의 전화번호도 주소도 몰랐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걱정이 밀려왔다. 여관로비에 앉아있는데 전날 인사를 나누었던 윤태 씨가 내려왔다. 그에게 사정얘기를 했다. 그런데 그도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비슷한 일을 겪었다는 것이 아닌가. 윤태 씨의 사연은 이랬다.
밤차를 기다리며 카페에서 시간을 죽이고 있는데, 한 남자가 말을 시켰다. 남자는 자기 친척이 한국에 간호원으로 갈 거라면서 한국에 대해 아는 체를 했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남자가 윤태 씨를 집에 초대했다. 옆에 아내와 아이가 같이 있었기 때문에 이상한 사람일 거라는 생각은 못 했다. 집에 가자마자 남자는 카드 게임을 하자고 했다. 윤태 씨가 카드를 못 친다니까 남자가 카드를 가르쳐줬다. 잠시 후 어디선가 남자의 친구까지 나타나 셋이 게임을 하게 됐다. 남자는 돈을 걸자고 했다. 윤태 씨가 돈이 없다고 하자 반강제로 200달러를 빌려줬다. 남자와 남자의 친구는 게임을 하면서 계속 자기들 패를 보여줬다. 이기는 판이라고 생각한 윤태 씨는 자기 돈 100달러를 베팅했다. 그러자 남자가 가방에서 2000달러를 꺼내 배팅했다. 덜컥 겁이 난 윤태 씨가 그만 하고 싶다고 자기 돈 100달러를 돌려달라고 했다. 남자는 빌린 돈을 갚아야 돼서 당장은 못 준다면서 채권자를 만나는데 같이 가자고 했다. 남자와 그의 아내, 윤태 씨 이렇게 셋이 오토바이를 타고 채권자를 만나러 가게 됐다. 그런데 남자가 중간에 오토바이를 세우더니 윤태 씨에게 내리라고 했다. 채권자가 윤태 씨를 보면 가만두지 않을 테니 거기서 기다리라는 거였다. 뻔한 수작이었다. 윤태 씨는 오토바이 번호판이라도 봐두려고 했지만 하필 그때 비닐봉지가 번호판을 가리고 있었다.
윤태 씨는 이제와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상황이지만 그때는 그냥 그렇게 되더라고 했다.
두 여자가 정색을 하고 캄보디아의 어떤 점이 좋냐고 묻던 게 떠올랐다. 인도네시아인이라고 했지만 실은 그들도 캄보디아인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왜 다들 자기 친척이 간호사로 일한다고 하는 것일까? 캄보디아 사기꾼들 사이에선 한국에 외국인 간호사가 많다고 소문이 도는 것일까? 아니면 한국인이 외국인 노동자를 업신여기니까 한국인의 호감을 사려면 자기 친척을 막노동자라고 하면 안 되고 전문직인 간호사라고 하라는 매뉴얼이라도 도는 것일까?
두 여자가 사기꾼이라는 의심이 든 순간부터 그들이 왜 나를 당장 집으로 데러가지 않고 생각할 시간을 줬는지가 의문이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윤태 씨가 그럴 듯한 해석을 내놓았다. 신고할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 출발 당일에 만나려 했을 거라는 것이다. 상의 끝에 약속 장소에 나가지 않기로 했다.
한때 조간신문의 ‘오늘의 운세’를 즐겨봤다. 어느 날 아침에 본 ‘오늘의 운세’는 ‘행운’이었다. 종일 무슨 행운이 찾아올지 기다렸다. 그런데 저녁 때 엄마가 사온 초코파이 상자 안에 '한 상자 더' 당첨권이 들어있었다. 초코파이 '한 상자 더'가 내게 허락된 행운의 크기였던 것이다. 두 여자가 사기꾼이라는 심증이 커질수록 그들과의 만남이 모든 걸 주관하는 전지자의 배려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험을 꿈꿨으나 그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여행의 마지막 날을 맞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복권당첨이나 먼 친척으로부터의 유산상속 같은 행운이 내 몫이 아닌 것처럼, ‘비포 선 라이즈’의 로맨스나 ‘토탈 리콜’의 우주전쟁 같은 모험도 내 몫일 리 없었다. 윤태 씨가 겪은 한나절 정도가 이번 여행에서 내게 허락된 모험일 것이었다. 그러나 두 여자도 그렇고 그 분께서도 내게 생각할 시간을 준 게 잘 못이었다. 위험이 감지되자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 나는 행여 발이라도 헛디뎌 귀국에 착오가 생길 새라 바닥만 보면서 조심조심 걸었다.
일찌감치 공항으로 갔다. 겹겹으로 안전장치가 된 공항에 들어서자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공항의 익숙한 모습도 긴장을 풀게 했다. 첨단 금속과 유리로 된 아치형의 높은 천장과 외벽. 세계 어디나 공항의 모습은 똑같고 호찌민 공항도 예외가 아니었다. 시간이 많이 남아서 2층 카페에 앉았다. 유리난간 너머로 아래층이 내려다보이는 자리였다. 느긋하게 앉아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유리난간을 두드리며 소리를 지르는 게 들렸다. 돌아보니 배웅 나온 가족들이 아래층 출국장에 있는 친지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느라 그렇게 소란을 떠는 거였다. 반대편 유리벽으로는 공항 바깥이 내다보였는데, 대부분의 가족들은 경비가 막아선 탓에 안에는 못 들어오고 입구에 진을 치고 있었다. 직계가족은 물론이고 지방사는 친인척까지 모두 나온 분위기로 공항 입구가 도떼기시장을 방불케 했다. 베트남 사람들은 차갑고 규격화된 공항에서도 그렇게 뜨겁고 떠들썩하게 작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