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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파란 Jul 30. 2023

간 기증의 뒷맛은 달고 쓰고 맵고 짜다

고장 난 몸에 관한 기록


그간 우리가 걸어온 길을 돌이켜보면 남편과 난 정말 운이 좋았던 것임에 틀림없다. 처음 간암 진단 당시 무려 8센티에 육박했던 종양 크기로 암의 진행 병기 중 가장 심한 상태인 ‘4기’나 ‘말기’라고도 불리 수 없을 만큼 최악의 상황이었음에도 간절제술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거듭되는 재발을 겪고도 이식 수술을 받을 수 있는 몸 상태였던 것도, 또 내가 남편에게 간 기증을 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기적에 가까운 행운이다.  



   

달다

내 간을 이식받은 남편은 날이 갈수록 다른 몸이 됐다. 평일 저녁 빠짐없이 국선도를 하고 주말이면 동네 뒷산, 매월 한두 번은 높은 산을 오르는 등 스스로 관리한 덕이 가장 큰 힘이 됐을 것이다. 혈색도 좋아졌고 체력도 전과 다르다. 마치 회복에 탄력이 붙은 듯 수술 후 건강한 몸을 장착해 갔다.


생활습관면에서도 '개과천선'이라 할 수 있다. 하루가 멀다 하고 '교보문고' 택배상자가 문 앞에서 발견될 만큼 책에 파고들었고, 가족이 잠든 밤 식탁에 앉아 일기는 물론 필사와 한자 등을 쓰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쉬는 날은 강박에 가깝게 가족과 함께하는 의미 있는 시간을 가지며 동에 번쩍 서에 번쩍 기사를 자처했다. 미련할 정도로 일분일초를 허투루 쓰지 않았다.


과학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지만, 신기한 점도 있다. 예를 들어 원래 남편의 머리카락은 짙은 검은색에 두꺼운 데다 숱도 빼곡한 직모였다. 그 유전자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첫째 아이 역시 빈틈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머리숱 부자다. 그런데 어째 이식 수술 후 남편의 머리카락이 전과는 달리 힘을 잃은 듯 차분해지고 굵기도 확연히 얇아졌다. 그야말로 얇디얇은 딱 내 머리카락을 닮아가고 있다. 마치 나의 세포를 떼어내 복제인간을 만든 것 같기도 했고, 아니면 내가 셋째 아들을 낳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분명한 건 내가 한 사람을 다시 태어나게 했다는 사실이다.       


모든 게 순조롭다고 생각했지만, 단물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쓰다   

다른 몸이 된 건 남편만이 아닌 나도 마찬가지다. 건강해진 남편과 달리 내 몸은 여기저기 고장이 잦아졌다. 멀쩡하던 몸의 일부를 떼어내는 일은 역시 쉽게 볼 게 아니었다.      


몸을 조금 움직이기만 하면 천리길을 뛴 것 마냥 드러눕고 싶고, 드러누우면 기다렸다는 듯이 졸음이 밀려왔다. 이만하면 잤다 싶어 일어나려 해도 눈꺼풀은 미련을 부리며 축축 늘어졌고, 잔 거 같지도 않은 찌뿌둥함이 온몸에 덕지덕지 달라붙어 있었다. 단순히 체력이 떨어졌다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냥 난 다른 몸이 된 것 같았다.     


간 기증을 하게 되면 간의 6~70%를 떼어낸다. 간은 재생능력이 있어 크기 회복이 된다고는 하지만 100% 원상태로 돌아올 수는 없다. 일반인이 생활하기에 무리가 없을 만큼의 크기와 기능으로 되돌아올 뿐이다. 수술 후 3개월여간은 무리를 하지 말라고 했다. 물론 내가 무리하게 운동을 하거나 몸을 쓰지는 않지만, 내겐 손 많이 가는 열 살 전후의 아들 둘과 진짜 환자인 남편이 있다. 무리를 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쉴 수도 없는 형편이었던 거다.       


수술을 하고 2년쯤 지난 어느 날, 단순히 피곤하고 기운이 없고의 문제가 아닌 생활의 불편을 동반한 아픔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며칠 째 안구에 막이 덧씌워진 것처럼 뿌옇고 이물감이 느껴져 안과를 찾았다. 안구건조증에 노안이 시작된 거라며 인공눈물 처방을 받았다. 눈이 불편할 때마다 인공눈물을 넣었지만, 뿌연 시야는 나아지지 않았고 급기야 미칠 것 같은 두통이 밀려왔고 그야말로 눈알이 빠질 것 같았다.


노안을 운운하던 의사를 도저히 믿을 수 없어 다른 안과를 찾았더니 안압이 심각하게 높은 상태로 방치한 결과 급성 녹내장이라는 예상치 못한 말을 들어야 했고 급기야 의사 선생님 입에서는 하마터면 왼쪽눈이 ‘실명’할 수도 있었다는 말까지 튀어나왔다. 수일간 치료를 받으며 안압은 제자리를 찾았지만, ‘포도막염’이라는 진단과 혈액검사를 받아보라는 의뢰서까지 추가됐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안과의 바통을 이어받은 내과에서 다양한 검사를 받으며 시간을 흘려보낸 후 생전 들어보지도 못했던 ‘HLA-B51’ 양성으로 류머티스내과 진료의뢰로 이어졌다. 그렇게 가게 된 류머티스 내과에서 ‘강직성 척추염’ 진단을 받고 자가면역질환자로 등극했다.


강직성 척추염은 보통 남성에게서 많이 발현되는 병으로 심각할 경우는 군입대 면제가 될만큼 난치성 질환이라고 한다. 류마티스 내과 대기실에서 만난 대부분의 환자들 역시 남자이거나 어르신들이었다. 그렇다면 내게 왜 이런 병이 느닷없이 찾아온 걸까. 담당의는 대개의 병이 원인을 명확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여성의 경우는 출산이나 큰 수술을 겪으며 외부 자극이나 염증으로 인한 결과일 수도 있다는 말을 덧붙였다. '큰 수술'이라는 말에 가슴이 덜컥 댔다.

뿌연 눈에서 시작해 산정특례대상자까지 된 며칠 간의 일이 꿈같다. 이로써 우리는 남편은 암, 아내는 희귀 중증난치질환으로 산정특례 부부가 됐다며 쓰디쓴 웃음으로 깔깔댔다.        



맵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엔 두통이 불쑥 찾아왔다. 워낙 편두통이 잦아서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타이레놀 몇 알로 일주일 정도를 버텼다. 그런데 통증이 머리에서 귀 아래로 내려오더니 아픔의 정도가 '보통'에서 '심함'을 넘나들었다.


통증 부위로 미루어 임파선염이 아닐까 해서 이비인후과로 병원 원정이 시작됐다. 멍울이 없어 임파선염은 아니란다.


그 와중에 류머티스 내과 외래가 있었고, 당시 두통에 대해 말씀드렸더니 강직성척추염으로 복용 중인 소염제가 효과가 있을 수 있으니 빠뜨리지 말고 잘 복용하라 신다. 그런데 소염제만으로는 두통을 휘어잡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다음은 내과다. 전에 강직성척추염 진단의 단초가 되었던 혈액검사를 한 병원에 갔다. 선생님께서 결국 강직성척추염 진단을 받았냐며 안타까워하셨다. 구토나 어지럼증은 없으니 긴장성 두통일 가능성이 크다며 근육이완제도 함께 처방받았다. 먹는 약이 점점 늘어갔다. 그러나 회당 5개의 알약을 먹어도 차도는 없었고 오히려 통증은 ‘심함’에서 ‘매우 심함’으로 넘어갔다.


길을 잃은 기분으로 마지막 종착역과도 같은 신경과를 찾았다. 그간의 상황을 말씀드리고 가볍게 엑스레이로 검사의 서막이 열렸다. 살짝 일자목이긴 한데 염증은 없고 강직성척추염에 따른 것으로 보일 뿐 경추성 두통은 아닐 거란다. 다음에는 혈류 초음파 검사다. 혈류가 느리단다. 이 또한 자가면역질환이 원인이 될 수도 있지만, 스트레스와 면역력 저하는 말할 것도 없이 의심원인 1순위라신다. 애매모호한 결과로 결국 MRI 선택의 기로에 섰다. 비용 때문에 선택권을 주셨는데 그때의 난 비용이 문제가 아니었다. 제발 두통의 원인을 찾아 뿌리째 뽑아 버리고 싶은 마음만 간절했기 때문에 당연히 MRI를 찍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검사 결과 유의미한 이상소견은 없었다. 다행이었지만 동시에 답답했다. 어찌 됐든 잠정결론은 느린 혈류 때문으로 처방약에 혈액순환제가 추가됐을 뿐이다.     


그 후로도 수일간 두통은 나아지지 않았고 항불안제와 말초 신경제 등 계속 약만 늘어나 급기야 한 번에 먹는 약이 아홉 개에 이르렀다. 아무리 약을 써대도 호전은커녕 악화일로를 걷고 있으니 또다시 검사의 늪에 빠지게 된다. 목디스크 가능성을 염두에 둔 근전도와 신경전도검서를 거쳐 끝장을 보기 위해 2차 MRI로 목 부위를 확인했다. 신경과에서 해 볼 수 있는 검사란 검사는 다 하며 비용과 시간을 썼지만, 결과는 원인불명.   

  

이유도 모른 채 아픈 머리를 부여잡고 살다 우연한 기회로 찾은 한의원에서 운명 같은 선생님을 만나 허리가 원인이라는 빛과 같은 말씀을 듣고 치료를 받으며 통증은 사라졌다.

     

한 달 가까이, 딱 여기가 지옥이다 싶은 두통을 겪으며 통증보다도 몸이 망가져 가고 있다는 사실이 무서웠다. ‘한 생명을 살리는데 이만한 대가도 없을 줄 알았나’라고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내게 속삭이는 것 같았다. 전장에서 살아남았지만 사지 불구가 됐거나, 상처뿐인 영광에 쓴웃음을 지어야 하는 사실상 패배자의 몸이 된 것 같았다.


당시 난 몸의 통증에서 벗어나고자 매운맛에 탐닉했다. 인생 참 맵다.



짜다


‘아이에게 아빠의 병에 대해 어떻게 말해야 할까?’ 남편의 병을 받아들이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과제였다. 큰아이는 아빠의 변화를 어렴풋이 알고 있다. 이를테면 배의 정 가운데에서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는 수술 자국이랄지, 하루에도 시간 맞춰 수차례 먹어야 하는 약이랄지, 때때로 혹은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입원이랄지. 하지만 묻지 않았다. 아빠가 진짜 큰 병에 걸린 건 아닐까, 혹시라도 우리를 두고 돌아가시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 애써 회피하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었다. 그렇다고 아이에게 아빠가 간암에 걸렸는데 수술도 했고 앞으로 계속 치료받으면 나을 거라고 말할 자신도 없었다. 아이의 마음이 다치지 않게, 걱정 한 방울도 남지 않게 말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고 차차 아이 마음을 불안이 잠식하게 될까 초조했다.      


전문가에게 도움을 청하고자 아이와 함께 구에서 운영하는 청소년복지센터를 찾았다. 본격적인 상담을 위해서는 종합심리평가를 받아야 했다. 아이의 인지 검사를 비롯해 사고 및 정서, 기질 및 성격, 신경 심리 검사 등이 포함됐고 주 양육자인 나 역시 수백 개에 달하는 문항에 답해야 했다.      


며칠 후 검사 결과를 들으러 갔다. 그땐 아이 없이 나 혼자였다. 마주 앉은 상담사가 결과지를 건네주었다. 전문용어가 많이 들어간 내용이라 상담사가 읽어 내려가며 설명을 해 주었는데 빼곡한 글자들 사이에서 눈길도 마음도 덜컥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기질 및 성격’

‘자신의 부정적 감정을 삼키고 내재화하는 경향이 강하다 보니 불편감이 클 수 있겠다’


역시 내가 우려하던 부분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하고 싶은 말을 내뱉기보다는 삼키는 쪽에 가까운 아이였다. 마음속에 하지 못해 고여있는 말이 많을 아이다. 부모가 무서운 건지,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그저 속이 깊은 아이라서 인지 이유를 몰랐다. 아이의 생각을 들여다보고 싶었고 놀이치료를 받아보기로 했다.


그런데, 결과를 설명하던 상담사는 아이보다 엄마, 그러니까 내 문제가 더 크다고 했다.     

 

보호자 검사 결과(모)     
자기 보고식 검사인 MMPI-2 결과, 모는 상당한 수준의 우울감과 걱정, 근심 및 긴장감 등을 경험하고 있는 상태로, 일상생활을 해나가기 위한 에너지가 결여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 누적된 스트레스로 인해 지쳐있고 자아 강도도 저하되어 있어, 일상생활 속 사소한 자극에도 불안정해지기 쉽겠으며, 여기에 사람들과 관계 안에서 느끼는 불편감도 큰 것으로 나타나 관계 안에서 발생하는 여러 문제나 갈등 장면에 효율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스트레스에 압도되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많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 모 역시 상당한 수준의 정서적 불편감을 경험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이러한 모의 힘든 마음은 자녀와 긍정적인 상호작용 및 안정된 양육 태도를 유지하는 데 걸림돌이 될 수 있는 바, 모의 정서 회복을 위한 심리상담이 아동의 심리치료와 병행되어야 할 것으로 사료된다.     


“그럼 제가 우울증인 건가요?”

“말하자면 그렇죠”

“늘 우울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우울증 진단 비슷한 걸 받으니 슬프네요”

“약을 처방받는 것도 도움이 많이 될 수 있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병원 진료를 받아보시는 것도 괜찮아요”

“제가 병원에 가야 할... 그 정도인가요?”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마음의 감기라고 생각하세요”     

그리고 아이를 위해서는 내 회복이 먼저라고 강조하셨다.


내가 앓고 있는 ‘마음의 감기’를 아이에게 전염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니 겁이 났다. 기침 몇 번으로 옮길 수 있는 게 감기다. 찌들고 팍팍한 고단한 일상이 담긴 내 몇 마디로 아이에게 우울이 옮겨갈 것이다.



지난 몇 년간 내 몸에 일어난 일이 남편과 함께한 간이식 수술 때문이라고 명확한 인과관계로 설명할 수는 없다. 하지만 수술 후 난 급격하게 달라졌다. 몸도 마음도.


내 배를 가로 세로 지르는 수술 흉터는 아물어갔지만, 내 마음에 자리 잡은 불안은 갈수록 진해졌다.

그리고 짜디짠 눈물을 흘리는 시간도 많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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