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한 번쯤 유럽 여행을 꿈꾼다. 젊은 시절, 배낭 하나 둘러메고 호기롭게 유럽을 활보한 청춘들은 삶이 힘들 때마다 소중했던 추억의 갈피를 들추곤 한다. 정년퇴직 후 여유로운 마음으로 부부동반 유럽 여행을 떠난 이들은 깊어진 연륜만큼 유럽의 역사와 문화를 느끼고 체험한다. 1년 이상 지속된 코로나19의 암울한 상황 속에서 이제 유럽은 아련한 첫사랑의 그리움처럼 우리 마음 한 구석에 쓸쓸히 남겨져 있다.
나에게 유럽은 친근한 이웃이자 따뜻한 힐링의 공간이다. 내가 유럽에서 보낸 시간은 제법 오래되었다. 2013년과 2020년은 1년 내내 유럽에서 생활했고, 그 사이사이로 여행하고 출장 다녀온 기간을 합치면 2년을 훌쩍 넘긴다. 나보다 훨씬 오랫동안 유럽에 머문 한국 사람은 당연히 많을 것이다. 하지만 나보다 더 다양하고 여유롭게 유럽을 경험한 한국인은 아마도 거의 없을 것이다.
브뤼셀과 비엔나에서 평화와 봉쇄를 경험하다
유럽은 유라시아 대륙의 서편에 위치해 있는, 정치경제적-종교적-문화적 아이덴티티가 유사한 국가들을 의미한다. 역사적으로는 15~17세기 이른바 대항해시대에 세계 곳곳을 식민 지배하는 전성기를 구가했고, 절대왕정과 맞선 의회민주주의 전통 속에서 인간의 자유와 평등이라는 천부적 인권을 확립했다. 유럽연합(EU)이라는 입법, 사법, 행정 기능을 모두 갖춘 역사상 전무후무한 정치 경제 공동체를 출범시키기도 했다.
기본적으로 유럽은 인종과 지역을 기준으로 크게 네 부류로 구분할 수 있다. 남서부 지역의 라틴계, 중북부 지역의 게르만계, 동부 지역의 슬라브계 그리고 영국을 중심으로 한 앵글로색슨계. 특히 이 중에서도 프랑스 중심의 남서부 라틴 국가들과 독일 중심의 중북부 게르만 국가들이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가장 유럽다운 색깔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내가 2013년에 벨기에 브뤼셀에서, 2020년에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각각 1년 동안 지낸 것은 그런 측면에서 매우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2013년 유럽은 매우 평화롭고 활기찬 분위기였지만, 2020년의 유럽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혹독한 봉쇄 속에서 암울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유럽을 대표하는 두 문화권에서, 너무도 대조적인 상황을 유러피언과 함께 경험한 나는 본의 아니게 누구보다도 유럽의 다양한 모습들을 목격할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유럽에 거주하던 2년 동안 내가 비교적 자유롭게 일상 속 관찰을 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브뤼셀 시절에는 루벤대학교 방문연구원으로 지내며 틈나는 대로 산책하고 쇼핑하고 여행을 했다. 비엔나 시절에는 국제기구에서 근무하게 된 아내 덕분에 배우자 동반휴직을 신청하고 그야말로 백수의 신분으로 하루 종일 비엔나 거리와 공원을 돌아다녔다.
한겨울 눈 내린 슈타트파크(좌)와 매일 아침 강아지와 산책하던 도나우파크(우)
아무리 오랜 기간을 유럽에서 머물러 있더라도, 직장이나 학교를 다니다 보면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한정된 공간에서 반복된 하루를 보낼 수밖에 없다.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그리고 고맙게도 나는 유럽에서 보낸 2년 동안 한결 여유로운 마음과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그들의 일상을 바라보고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지금도 내 머릿속에는 나지막한 우리 집과 잔디언덕, 즐겨가는 마트 앞 버스킹 청년과 다정한 이웃 아주머니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책을 쓰게 된 계기, 전하고 싶은 이야기
브뤼셀에서 지낸 1년 동안 정말 원 없이 이곳저곳을 여행했다. 벨기에의 아름다운 운하도시 브뤼헤를 비롯해서 차로 1, 2시간만 운전하면 소박하면서도 아담한 유럽 풍의 전원 마을을 발견할 수 있었다. 라이언에어 같은 저가항공과 에어비엔비 숙박을 이용하면 근처의 유럽 국가들을 얼마든지 저비용 고효율로 체험할 수 있었다. 그 시절, 나는 마치 스펀지처럼 아무 생각 없이 유럽의 문화와 역사를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비엔나에서의 1년은 코로나19라는 글로벌 펜데믹과 함께 보냈다. 행동반경이 좁아진 덕분에 매일 비엔나 거리를 거닐며 도시의 숨겨진 매력에 푹 빠졌다. 그렇게 3개월 정도를 보내고 나니, 7년 전의 강렬했던 브뤼셀 추억이 덧대지면서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유럽의 모습이 종합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50년 이상 살아온 한국과 비교하며 무엇이 다른지, 어떤 점을 배워야 할지 찬찬히 분석할 수 있었다. 일단 몇 가지 아이템을 정하고 글을 쓰기 시작하니, 머릿속에서 주제가 샘솟듯이 이어졌다. 그렇게 이 책이 만들어졌다.
노을 진 도나우 강변을 산책하다 보면 신기하게도 글감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보통 유럽을 소재로 작성한 책들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된다. 하나는 여행 에세이다. 특정 국가 또는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먹고 마시고 보고 만난 경험을 글과 사진으로 풀어낸다. 다른 하나는 묵직한 주제를 담은 칼럼이다. 정치, 경제, 문화, 종교 중에서 작가에게 익숙한 주제를 선택하여 유럽을 분석한다. 북유럽 국가들의 사회복지 제도 연구나 프랑스 혁명사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이 책은 여행 에세이보다 시사칼럼에 가깝다. 하지만 미디어와 문화, 정치커뮤니케이션을 전공한 나의 관심사는 한 군데에 머무르지 않는다. 한 우물을 깊게 파기보다는 얕은 강가에서 첨벙첨벙 뛰어노는 방식을 택했다. 유럽의 정치와 경제, 교육과 문화는 씨줄과 날줄처럼 엮여 있어서, 그 미묘한 상호관계를 함께 이해해야만 전체를 보는 시각을 갖출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침내 보이기 시작한 유럽의 모습
삶의 여유와 일상의 행복을 추구하는 유럽인들은 정성스럽게 가꾸어진 공원과 도시를 가로지르는 강가에서 휴식을 즐긴다. 소득의 절반 가까이를 세금으로 걷는 국가는 교육과 의료, 주거 복지를 책임진다. "배우고자 하는 누구나에게 교육은 열려 있어야 한다"는 모토 하에 대학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는 반면, 대부분의 학생들은 우리의 중고등학교에 해당하는 세컨더리 스쿨부터 직업훈련을 병행한다. 대학 졸업장보다 실용적인 장인정신을 우대하는 사회분위기가 지배적이다.
국가와 지역사회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운영되고 있는 생활스포츠 센터에는 낮에는 학생들이, 오후에는 일찍 퇴근한 직장인들이 다양한 스포츠를 즐기며 커뮤니티 활동을 한다. CCTV보다 프라이버시가 우선되고, 획일화된 집단의식보다각자의 개성이 존중되는 유럽에서는 지역마다 독특한 풍미를 자랑하는 맥주와 와인을 마실 수 있고, 누드 스파에서 원초적인 힐링을 만끽할 수 있다.
누군가 나에게 당신이 경험한 유럽을 한마디로 정의하라고 한다면, "폭넓은 사회복지와 문화 다양성을 토대로 인간 존중의 문화가 뿌리내린 곳"이라고 나는 말할 것이다. 7년이라는 시차를 두고 벨기에와 오스트리아에 1년씩 거주했던 나는, 유럽의 주요 국가들이 노동시간을 단축하고 자기 계발을 하거나 여가를 즐길 수 있는 생활복지에 정책의 우선순위를 두고 있음을 확인했다. 사치스러운 과소비는 힘들지만, 소박한 취미활동이나 자연 속 힐링은 얼마든지 가능한 곳이 내가 살았던 유럽의 모습이다.
유럽에는 어디든 노천카페가 있고, 사람들은 웃고 떠들며 먹고 마신다
프랑스와 독일을 비롯한 여러 유럽 국가들은 민주주의와 근대 산업발전을 주도해왔지만, 최근에는 지속 가능한 성장과 복지, 자연과의 조화라는 새로운 이상을 추구하고 있다. 두 차례 세계 대전에 대한 뼈저린 반성과 승자독식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며 영미식 정치 경제 시스템이나 중러의 국가 주도 사회주의와는 다른 제3의 길을 걷고 있다.
사회적으로 추구하는 가치가 획일화되어 있고 대도시 중심으로 인구가 과밀한 한국 사회에서는 치열한 경쟁과 공정한 기회가 여전히 뜨거운 화두다. 다른 한편으로는 삶의 질을 보장하기 위한 사회복지 정책을 놓고 백가쟁명식 논쟁을 벌이고 있다. 지극히 실용적이고 각자의 개성을 존중하는 유럽은 한국만큼 '공정한 과정'이 중요하지 않다. 개인이 아닌 공동체의 부를 선택한 유럽에서는 과도한 복지로 인한 국가적인 활력 상실이 오히려 더 큰 이슈다.
나는 이 책에서 비엔나로 대표되는 유럽의 과거와 현재를 내 나름의 시각으로 살펴보았다. 당연하게도 모든 챕터에는 한국과의 비교를 통해 의미 있는 시사점을 전하고자 했다. 물론 때로는 단지 차이를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때가 있었다. 한국 사회가 서로를 인간적으로 존중하고 행복한 공존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나의 유럽 이야기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가슴 깊이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