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력한 조세정책과 광범위한 복지혜택을 모토로 한 유럽 경제의 현실
현재 우리가 유럽이라고 부르는 지역은 유라시아 대륙의 서편에 위치해 있는, 정치경제적-종교적-문화적 아이덴티티가 유사한 국가들로 구성되어 있다. 역사적으로는 15~17세기 이른바 대항해시대에 세계 곳곳을 식민 지배하는 전성기를 구가했고, 절대왕정과 맞선 의회민주주의 전통 속에서 인간의 자유와 평등이라는 천부적 인권을 확립했다.
하지만 종교를 둘러싼 지속적인 갈등과 두 차례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유럽은 현재의 강국이 아닌 과거 화려한 전성기를 보낸 '라떼' 대륙으로 전락했다. 그 자리를 미국과 소련(현재 러시아), 일본과 중국이 차지하며 글로벌 정치 경제를 대표하는 강국으로 떠올랐다. 어느덧 유럽은 단지 역사 문화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는, 노쇠하고 완고하며 활력 부족한 지역으로 묘사되고 있다.
과연 정말 그럴까? 위기에 처한 유럽 국가들은 스스로 자구책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아픔을 극복하기 위해 국가 간 자본과 서비스, 노동력을 자유롭게 이동하게 하고 관세와 통화 동맹을 통해 경제협력을 강화했다. 그리고 마침내 1994년 유럽연합(European Union, 이하 EU)이라는 입법, 사법, 행정 기능을 모두 갖춘 역사상 전무후무한 정치 경제 공동체를 출범시켰다.
미국식 신자유주의 시스템이 탐욕적인 금융자본을 탄생시키고 극심한 빈부격차를 초래하고 있는 지금, 유럽이 추구하고 있는 사회민주주의 경제 시스템의 가치가 새삼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강력한 조세정책과 광범위한 복지혜택을 모토로 한 유럽 경제가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은 무엇인지, 지금부터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유럽 주요 국가들의 세금 현황은 2015년 10월 유럽 의회에서 발표한 자료를 통해 알기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먼저 국가 이름 위에 있는 갈색 막대는 간접세, 빨간 막대는 직접세를 나타낸다. 막대 옆에 있는 갈색 숫자와 빨간 숫자는 GDP 대비 간접세와 직접세의 비율을 가리킨다.
막대그래프 옆에 있는 파이 차트는 과세 비율을 보여준다. 노란색은 자본에 대한 과세(법인세 등), 분홍색은 노동에 대한 과세(소득세 등), 보라색은 소비에 대한 과세(부가가치세)를 의미하며, 파이 차트 하단의 숫자를 통해 GDP 대비 조세 비율을 확인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GDP 대비 세금 비율을 살펴보면, 덴마크가 48.1%로 가장 높았다. 국내 총생산액의 절반 가량을 세금이 차지하고 있는 셈이다. 그 뒤를 이어 벨기에(45.4%), 프랑스(45.0%), 스웨덴(44.2%), 핀란드(44.1%), 오스트리아(43.1%)가 40% 이상의 높은 조세 비율을 기록했다.
이에 비해 아일랜드(28.7%), 슬로바키아(28.3%), 불가리아(27.9%), 리투아니아(27.2%)는 20%대를 기록하여 유럽에서 GDP 대비 세금 비율이 낮은 국가군으로 분류된다. 참고로 한국은 2015년 기준 GDP 대비 세금 비율이 25.2%다. 유럽에서 세금 비율이 가장 낮은 리투아니아보다도 2% 포인트가 적은 수치다.
지금까지 전체 재정에서 세금이 차지하는 비중을 살펴보았다면, 독일 사례를 통해 개인에게 부과되는 소득세율을 자세히 알아보기로 하자. 현재 독일의 소득세는 누진세 개념으로 차등 적용되는데 최고세율은 47.5%다. 최고세율이 적용되는 대상은 254,447유로, 한화로 환산하면 연간 3억 6천만 원 이상을 벌어들이는 개인소득자들이다.
참고로 한국은 최근 발표한 2020년 세법개정안에서 소득세 최고세율을 42%에서 45%로 인상하기로 했다. 경제지를 비롯한 보수언론들은 대표적인 복지국가들인 북유럽 3국마저 추월했다며 자극적인 헤드라인으로 보도했다. 그러나 우리는 최고세율 적용대상이 연간 10억 원 이상의 고소득자인 반면, 유럽은 독일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적용기준이 훨씬 낮다는 사실을 구태여 밝히지 않았다.
최고세율 대상이 아닌 일반적인 독일의 근로소득자는 근로세와 통일세, 종교세 등 제세금과 국민연금, 건강보험, 고용보험 등 각종 사회보험료를 공제한 금액을 세후 실수령액으로 받게 된다. 독일은 부양가족 유무, 결혼 유무, 소득 수준 등에 따라 총 6개의 세금 등급(Steuerklasse)으로 구분되는데, 보통 기혼에 부양가족이 있으면 35%, 미혼에 솔로면 40% 정도를 세금 및 사회보험료로 낸다.
따라서 연간 5만 7000유로(한화 약 8000만 원)를 버는 독일의 근로소득자는 대략 2만 520유로(36%)를 공제한 3만 6480유로(5130만 원)를 세후 금액으로 수령하게 된다. 구체적으로 세금(소득세+통일세)이 9690유로(17%), 건강보험을 비롯한 사회보험료가 1만 830유로(19%)를 차지한다.
반면 동일 금액인 연봉 8000만 원의 한국 근로소득자는 근로세와 사회보험료를 합친 1160만 원(14.5%)을 공제한 6840만 원을 세후 금액으로 받게 된다. 대략 소득세가 520만 원(6.5%)이고 사회보험료가 640만 원(8%)이다. 또한 한국은 별도의 세금 등급이 없는 대신, 부양가족 수에 따라 연말정산으로 환급을 받게 된다.
결론적으로 연봉 8000만 원의 한국 노동자는 소득세와 사회보험료를 공제한 6840만 원을 실제로 받게 된다. 이에 비해 동일 연봉의 독일 노동자는 5130만 원을 실수령액으로 받는다. 한국의 노동자가 독일 노동자에 비해 1700만 원 정도 더 받으며, 세전 연봉 기준으로는 20% 이상 차이가 난다.
그렇다면 독일 노동자에 비해 가처분소득이 훨씬 많은 한국 노동자가 그만큼 행복하고 풍요로운 일상을 누려야 마땅하다. 하지만 실상이 그렇지 않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유럽의 주요 국가들이 실시하고 있는 강력한 조세정책은 다양하고 폭넓은 사회복지제도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 한마디로 많이 걷은 만큼 많은 혜택을 베풀고 있는 것이다. 일상적으로 지출하는 교육비와 의료비의 비중이 매우 낮다. 여기에 연금을 비롯한 주요 사회보험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고, 노동시간과 휴가일수 등을 확실하게 보장하여 화려하진 않아도 소박한 여유로움을 즐길 수 있다.
사회복지제도와 관련하여, 내가 살고 있는 오스트리아는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오스트리아는 2017년 기준 GDP의 21%에 해당하는 7600만 유로를 사회복지 예산으로 지출했다. 참고로 2017년 한국의 사회복지 예산 비중은 GDP의 10.6%였고, OECD 평균은 20.1%였다.
현재 일하고 있는 시민들을 위한 복지, 즉 노동복지는 주당 노동시간 40시간 이하, 근속연수에 따른 25~30일 유급휴가 보장을 기반으로 1년에 14개월치의 월급(분기별로 1/4씩, 크리스마스에 1달치 추가 지급)을 지급받는다. 오스트리아는 전통적인 노-사-정 협력체계(Social Partnership) 하에서 노사관계가 안정되어 있다.
실제로 오스트리아 시민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정시퇴근 문화가 정착되어 있고 유연근무제도가 활성화되어 있어서 과로와 야근 같은 직장 스트레스를 거의 느끼지 않는다고 한다. 게다가 자기 계발을 위한 교육을 신청하면 비용의 절반, 최대 3,000유로까지 지원을 받는다. 실업자의 경우, AMS라는 기관에서 별로 관리하는데 허가받은 교육에 한해 전액 지원받을 수 있다.
고용보험에 가입되어 있고 취업의지는 있지만 현재 실직 상태인 사람들을 위한 실업자 지원체계 역시 잘 구비되어 있다. 기본적으로 최소 20주 이상 매월 실업수당이 지급되는데 금액은 이전 소득(실수령액) 기준 55%이며 부양가족에 따라 추가 지급된다. 뿐만 아니라 소득지원, 조기퇴직연금, 임시지원, 이전지출, 자기계발수당 등 다양한 지원을 받을 수 있다.
국민연금의 경우, 오스트리아는 '65-45-80 원칙'으로 운영된다. 즉, 은퇴연령은 65세까지 유지하고, 연금 납입기간은 45년을 준수하며, 수령금액은 전체 노동기간 동안 받은 임금의 80%를 지급하는 것이다. 물론 재원 고갈 상황에 대비하여 사회적 합의에 의한 변동은 가능하지만, 기본적으로 오스트리아 시민들은 이 원칙을 참고하여 노후를 안정적으로 대비한다.
요컨대 오스트리아는 세금을 많이 걷는 대신, 광범위하고 실질적인 사회복지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현재 일하고 있는 대다수 시민들을 위한 노동 복지를 필두로 하여, 실업자를 위한 지원체계와 은퇴한 노년층을 위한 연금 지급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있다. 일상적인 복지 차원에서는 교육비와 의료비 부담이 거의 없고, 생활물가가 저렴하다.
사실 한 나라의 사회복지제도가 얼마나 잘 갖춰져 있느냐 여부는 코로나19 같은 전대미문의 위기상황에서 확연하게 드러난다. 유럽의 대표적인 복지강국 오스트리아는 코로나19 확진자가 급증하던 지난해 3월 둘째 주부터 5월 첫째 주까지 이른바 '락다운(lockdowm)' 실시하면서, 이로 인해 경제적 타격을 받은 시민들에게 다양한 지원정책을 펼쳐왔다.
예를 들어, 정상적인 상황에서 100% 월급을 받을 직장인이 코로나로 인해 40% 밖에 받지 못했다면 국가가 나머지 60%를 지원했다. 개인사업자의 경우에는 첫 달에 1000유로의 지원금이 나왔고, 이후 5개월 동안 전년 또는 전전년 소득 기준 최대 80%까지 지급했다. 또한 한시적인 소득세율 감면 등 가능한 모든 조치들을 실행하고 있다.
한국은 전 국민을 대상으로 1인당 20만 원, 4인 가족 기준 100만 원의 긴급재난지원금을 지급한 바 있다. 연방제 국가인 오스트리아는 비엔나에서만 1인 가구 25유로, 2인 이상 가구 50유로를 지급했다. 기본적으로 오스트리아는 노동을 하고 세금을 내는 사람들에게 그에 상응해서 지원을 하는 원칙을 갖고 있다. 실업자나 취약계층은 코로나와 무관하게 사회복지 차원에서 이미 지원받고 있기 때문이다.
세금을 적게 내고 복지를 적게 받는 것과 세금을 많이 내고 복지를 많이 받는 것이 결국 조삼모사이니 큰 차이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누구나 직장에서 해고되거나 사업이 부도날 수 있다. 내가 아무리 잘해도 글로벌 금융위기나 코로나19와 같은 팬데믹이 발생할 수 있다. 이러한 위기상황에서 다양한 지원체계를 갖춘 사회안전망을 확보하고 있는지 여부는 매우 중요하다.
사회민주주의 정당이 연립정부를 주도해온 다수의 유럽 국가들은 자본의 가치보다 노동의 가치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기업이 주도하는 시장자본주의가 아닌 노사정이 파트너로 참여하는 복지자본주의를 지향한다. 가치중립적인 아카데미 경제학이 아닌, 사회 불평등을 개선하는 복지경제학 측면에서 정책 효율성 증대를 위한 이론적 연구를 활발히 진행하고 있다.
한국은 정당의 이념적 스펙트럼이 불분명한 가운데 대기업 중심의 시장자본주의가 대세로 자리 잡았다. 경제성장이 최우선 과제였던 과거와 달리 사회복지에 대한 관심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지만, 접근방식은 여전히 거칠고 근시안적이다. 복지국가의 근간은 세수증대이고, 이를 위해서는 중상위 소득 시민들의 공감과 협조가 필수적이다. 투명한 행정과 공정한 집행은 당연한 전제조건이다.
화려함이나 사치스러움과는 거리가 멀지만, 스트레스 없는 일상의 소박한 행복을 누리고 있는 유럽 시민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한국에서 느낄 수 없었던 삶의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하곤 했다. 이른바 '유러피언 드림'이 상징하는 경제정책의 가치에 대해 우리 모두 열린 마음으로 논의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