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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진 Aug 04. 2020

정치권력의 정의로움은 어디에서 오는가?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의회 중심 연립정부 정치 체체가 주는 시사점

한국에서 흔히들 조언하는 대화 주제 금기어가 정치와 종교다. 섣불리 정치나 종교 이야기를 꺼냈다가 서로 감정만 상하기 일쑤라는 것이다. 역으로 생각하면,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있고 자신의 호불호가 분명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일방적으로 자기주장을 펼치기보다는 상대방의 의견을 경청하면서 사려 깊게 대화를 나누면 될 터인데, 기본적으로 토론 기술이 부족한 것도 한몫한다고 볼 수 있다. 


유럽에 2년여 거주하면서 발견한 사실은 여기 사람들도 한국 사람들 못지않게 정치에 관심이 많다는 점과 정치를 주제로 한 대화가 열띤 분위기 속에서도 부드럽고 합리적으로 진행된다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학교 교육에서 활발한 토론을 권장하고 짧든 길든 에세이를 작성해야 평가가 가능한 시스템을 마련해 놓았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오스트리아의 정치인들도 부패와 막말로 여론의 지탄을 받고 자리에서 쫓겨나곤 한다. 공개적인 기자회견에서 총리와 기자가 언성을 높여 싸우기도 한다. 자국 이기주의에 사로잡혀 국민들을 선동하는 극우정당이 생각보다 많은 지지를 받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의 정치체제, 특히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정치모델을 소개하는 이유는 정치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에서 우리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인 갈등과 대립을 중재하고 타협하여 자원이 적절하게 배분될 수 있도록 하는 과정에서 정치에 대한 신뢰도가 우리보다 높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두 나라 정치 시스템의 특성과 운영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기로 하자.


대화와 협력을 통한 의회 중심 연립정부


유럽의 정치체제를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의회 중심의 국정운영과 연립정부 구성을 위한 대화와 타협'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한국은 거의 대부분의 시기를 대통령제 중심의 단일 여당 체제로 지내왔다. 의회에서 선출한 총리가 실질적인 국가 최고 책임자이고, 국정을 책임지고 운영하기 위해 다른 정당과의 연합이 불가피한 상황에 당연히 익숙하지 않다.


먼저 유럽의 전통적인 맹주, 독일의 정치 환경을 살펴보자. 독일은 2017년 9월 선거에서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이끄는 기독민주당-기독사회연합 연합(CDU & CSU Union, 이하 기민련)이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연립정부 구성을 위해 이른바 자메이카(기민련-자유민주-녹색) 연합(3개 정당 상징색이 자메이카 국기색과 동일)을 추진했으나 실패로 돌아가고 총선 6개월 만인 2018년 2월 기민련은 제2당 사회민주당(SPD)과의 대연정에 합의했다.


네 번째 연임에 성공하여 2005년부터 2021년까지 16년 동안 독일을 이끌 예정인 앙겔라 메르켈 총리 


연정을 제안하고 협의하는 과정에서 각 정당의 핵심의제가 무엇인지, 어떤 정책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하고 때로는 절충했는지 모든 과정이 투명하게 공개된다. 자메이카 연정의 경우, 성립되면 과반(355석)을 훌쩍 뛰어넘는 393석을 확보하여 안정적인 국정운영이 가능했다. 하지만 자유주의 경제를 강조하는 자민당(FDP)과 환경보호를 중시하며 진보적인 노선을 추구하는 녹색당(Die Grünen) 그리고 기민련은 난민 수용과 화력발전소 폐쇄 등에서 근본적인 정책 차이를 극복하지 못했다.  


독일연방공화국의 연립정부 체제가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은 크게 네 가지다.


첫째, 유권자의 뜻을 최대한 반영하여 선거 대표성을 확보하려는 제도적 노력이다. 독일 총선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1인 2표(지역구 의원과 비례대표 정당)를 행사한다. 따라서 지역구 의원 299명, 정당명부제에 의한 비례대표 299명 총 598명으로 연방하원을 구성한다. 


하지만 5% 이상 지지를 받은 정당을 중심으로 의석을 배정하는 과정에서 비례대표 초과의석이 발생하면 그대로 수용한다. 한마디로 정해진 의석 수를 고집하기보다는 유권자의 정당 지지도를 감안하여 전체 의석 수를 유연하게 운영한다. 그 결과, 현재 독일 연방하원의원은 709명(111명 초과)이다.   


둘째, 양보와 타협을 통한 연립정부 구성에 익숙하다. 정당명부식 비례대표를 강화한 독일 선거제도에서는 어느 당도 과반을 넘기 힘들다. 따라서 이념과 정책이 상이한 정당들이 합종연횡하여 연정을 구성하게 되며, 이 과정에서 정당 간 정치적 협상력이 매우 중요해진다.


정치 여건의 변화에 따라 어느 당과도 연정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치열한 정쟁의 순간에도 파트너를 존중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물론 지난 19대 총선에서 돌풍을 일으키며 91석을 얻은 독일을 위한 대안(AfD, 이하 대안당)의 경우, 이민 반대와 EU 탈퇴 등 극우 성향이 강해 연정 파트너로 논의 조차 안 되는 경우도 있다. 어쨌든 다양한 연정 가능성을 고려한 타협의 정치야말로 독일의 핵심적인 리더십 덕목이다.     


셋째, 차기 집권을 위한 선명한 반대보다 원활한 국정 운영을 위한 협력이 중요하다. 독일은 전통적으로 중도보수 기민당과 중도진보 사민당이 1, 2당으로 라이벌 구도를 형성해 왔다. 사민당 입장에서는 기민당과의 연정을 통해 얻는 눈앞의 이익도 중요하지만, 확실한 야당으로 자리매김하여 대안세력으로 인정받는 것이 장기적으로 유리하다. 하지만 자메이카 연정 구상이 깨지고 연정 수립이 위기에 봉착하자 다시 한번 기민당과 손을 잡았다.  


넷째, 16개 주의 연방체제인 독일은 주 정부와 의회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한다. 사법권과 행정권은 물론이고, 연방의회 후보 선출권도 지역에 있다. 지역정당에서 단련되고 주 의회에서 실력이 검증되어야 중앙정치에 진출할 수 있다. 연방정부/의회와 주 정부/의회의 적절한 역할 분담 속에서 지역 간 균형발전은 오래전부터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세계 최연소 총리를 탄생시킨 비결


오스트리아 역시 독일과 마찬가지로 의회 민주주의와 연방제를 채택한 공화국이다. 명목상의 국가수반인 대통령의 권한은 독일보다 강하다. 독일 대통령은 외교권과 정당 간 의견조정 권한만 있지만, 오스트리아 대통령은 여기에 더해 국군통수권과 법률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 권역별 비례대표제를 채택한 연방하원은 183석으로 구성된다.


오스트리아는 2017년 총선에서 11년 만에 중도우파 계열의 국민당(APP)이 다수당이 되어 극우 성향의 자유당(FPA)과 우파 연립정부를 구성했다. 그 결과 국민당 당수인 제바스티안 쿠르츠가 31세의 나이로 총리가 되었다. 역대 세계 최연소 지도자가 탄생한 것이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연정 파트너인 자유당 하인츠-크리스티안 슈트라헤 부총리가 '러시아 스캔들'로 사퇴하면서 쿠르츠 총리 역시 불신임 투표 가결로 불명예 퇴진했다. 


2019년 9월 치러진 조기총선에서 국민당, 사회민주당, 자유당에 이어 녹색당이 14%라는 사상 최대 득표율을 기록하며 4위로 원내 진입에 성공했다. 그 결과, 중도보수 국민당과 진보적 환경보호 정당인 녹색당이 연합한 이른바 그린콘(Greencon) 정권이 탄생했다. 깔끔한 정장에 단정한 헤어스타일의 33세 쿠르츠 총리와 평생 넥타이를 매 본 적이 없는 소박한 성품의 58세 고글러 부총리(녹색당 대표)의 어색한 만남이 어떤 결말로 이어질지 자못 궁금하다.


오스트리아 연정에 합의한 국민당 대표 제바스티안 쿠르츠 총리와 녹색당 대표 베르너 코글러 부총리 겸 문화부 장관


오스트리아도 독일 못지않게 선거 대표성을 확보하고 대화와 타협을 통해 연립정부를 구성하는 문화에 익숙하다. 그밖에 오스트리아의 정치체제와 운영방식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시사점은 다음 두 가지다.


첫째, 유연한 보수정당과 합리적인 환경정당의 결합을 통해 21세기형 연정 모델이 만들어졌다. 유럽에서 그린콘 연립정부가 구성된 국가는 오스트리아와 아일랜드다. 아일랜드에서도 중도우파 양대 정당인 통일아일랜드당과 공화당 그리고 녹색당이 연립정부를 구성했다.  


전통적으로 환경 분야는 진보 진영에 어울리는 이슈였다. 실제로 독일에서는 1998년부터 2005년까지 중도좌파 성향의 사회민주당과 녹색당이 연합하여 사민-녹색당 연립정부를 구성하기도 했다. 하지만 유럽의 보수 정당들이 사회 이슈에 진보적인 입장을 보이고, 환경론자들이 지속 가능한 경제발전에 열린 자세를 취하면서 전례 없는 보수와 환경의 연합이 가능해졌다.


둘째, 젊은 정치신인들이 마음껏 능력을 펼치고 지도자로 성장할 수 있는 정치문화가 마련되어 있다. 세계 최연소 총리 제바스티안 쿠르츠는 16세에 청년 국민당 당원으로 정치에 입문하여 비엔나 시의회 의원, 내무부 소속 사회통합 정무차관, 외교부 장관을 거쳐 총리까지 되었다. 


정치에 참여한 청년들을 교육하고 실무경험을 쌓게 하는 등 정당별 육성 프로그램이 활성화되어 있기 때문에, 선거에 임박해 외부에서 인재를 영입하는 일이 거의 없다. 돈 없는 젊은이들도 얼마든지 선거에 출마할 수 있도록 선거공영제가 확실하게 자리 잡고 있으며, 만 16세부터 선거권을 갖기 때문에 청소년들의 정치에 대한 관심이 높다.   


유럽 정치의 본질은 타협과 양보의 토론 문화


10여 년 전 한국에서는 마이클 샌델의 저서 <정의란 무엇인가>가 뜨거운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정치권력의 부패와 사회적 불평등에 분노하는 시민들에게 과연 우리 사회의 정의란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문제는 정의(justice)를 정의(definition) 하기 힘들다는 점이다. 어떤 가치관과 태도를 갖느냐에 따라 정의의 강조점은 달라진다. 이해관계가 맞물리는 구체적인 현실에서 정의를 구현하기는 더욱 어렵다. 


이런 관점에서, 이 글의 주제이기도 한 정치권력의 정의로움은 고정된 이념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치열한 토론의 과정에서 발견된다. 성과의 풍요로움을 기뻐하기에 앞서 절차의 정당성을 진지하게 성찰해야 한다. 현실적인 유불리를 앞세우기보다는 본질적인 비전을 공유하고 거시적인 안목으로 전략을 수립할 필요가 있다.


구체적으로 한국 정치에서 시급히 개선되어야 할 과제는 정치에 참여하고 싶은 사람들, 특히 젊은 세대들에게 문호를 적극적으로 개방하고 능력 있는 정치 신인들에게 과감하게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점이다. 김대중, 김영삼 두 전직 대통령이 40대 기수론을 앞세우고 당권에 도전했던 때가 1970년대인데, 그로부터 50여 년이 지난 지금 우리 정치는 50대 이상 남성들이 주류를 구성한 그들만의 리그가 되어 있다.


시대의 변화에 맞게 국회의원 선거제도를 근본적으로 개선하는 작업도 매우 중요하다. 현재의 방식으로는 다양한 사회적 가치를 구현할 수 있는 정당이 출현하기 힘들고, 유권자들의 표심도 심각하게 훼손된다. 현재의 대통령 중심제를 유지하더라도 의회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국정 운영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함을 우리는 뼈저리게 경험해왔다.


한국에서 정치는 가장 뜨겁고 시끄러운 영역이다. 정치권력을 누가 잡느냐를 놓고 그야말로 사생결단식 대결이 몇 년 간격으로 벌어진다. 분위기를 차분하게 진정시키고 엄정하게 감시해야 할 일부 언론 역시 또 다른 무소불위의 권력이 되어 자신의 이익을 관철시키는데만 혈안이 되어 있다. 결국 언론의 프리즘을 통해 정치를 바라보는 시민들에게는 하루하루가 고역이다.


대화와 타협이 실종된 정치의 결말은 파국이다. 그들만의 파국이면 좋으련만, 국가마저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트린다.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세워진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은 보수주의 정당과 사회주의 정당 간 파괴적인 정쟁 끝에 나치 독일에게 나라를 빼앗기는 비운을 겪어야 했다. 1945년 이후 지금까지 이어진 제2공화국의 정당들이 이념 차이에도 불구하고 상호 존중하고 배려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유럽과 한국은 정치가 진행되어 온 역사와 과정이 모두 다르다. 정치인의 자질과 시민의식에서도 분명한 차이가 존재한다. 독일과 오스트리아 사례를 통해 시사점을 얻을 수는 있지만, 이를 직접적으로 대입하여 우열을 따지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참조는 하되, 구체적인 실천과 집행은 우리 몫이다. 다만 정치권력의 정의로움은 이념과 정책의 다툼보다 타협과 양보의 과정에서 찾을 수 있음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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