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서(小暑)호, 넷째 주
에세이 - 나의 먹구름도 동력이라는 사람
다른 사람들이 나를 마냥 밝은 애라고 생각하는 게 싫어.
언젠가 영이 말했다. 하지만 영이 자주 웃으면 그녀와나의 그림자가 사이좋게 도망갔다.
친구는 끼리끼리라는 말이 있다. 서로 비슷한 사람끼리 더 빨리 친해지기 마련이다. 연인이랑은 또 다른 과정이다. 하지만 영과 나는 단연코 비슷한 성격이 아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빠르게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건 이유가 따로 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복사해 오고 싶은 점이 많았다는 거다. 영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새로운 사람과 가까워지는 것에 비관적인 상태였다. 이전의 좋은 친구들에게 멋대로 등을 돌렸었다. 염치가 있다면 다시는 보지 않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벽도 하나 세워뒀었다. 그런 태도로 매일을 살다가 후회할 때 즈음 영을 만났다. 영은 적극적이지 않았던 내게 호기심을 보였다. 둘의 아는 지인이 한 명 겹친다는 걸로 영의 질문이 시작됐다. 그렇게 나의 벽을 몇 번 건드려 보는 듯했다. 그녀만의 방식으로 조용하지만 보란 듯이 허물었다. 커다란 조명을 가지고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을 밝혔다. 내가 만난 사람들 중 처음 겪어보는 유형이었다.
영은 꼼지락꼼지락 혼자 음식을 잘한다. 적게는 하지 않는다. 많이 해서 나누면 나눴지, 부족한 건 싫은 것 같다. 가끔 그녀의 집에 놀러 가면 내가 말한 걸 뚝딱 만들어준다. 손이 야무지다. 춤도 잘 추고, 운동 신경이 좋다. 목소리는 또렷한 게 답답하지 않고, 웃음소리를 들으면 눈물이 쏙 들어간다.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인색하게 굴지 않는다. 현금을 매번 토큰처럼 챙겨 다니면서 베푼다. 영이 사줬던 주전부리들만 모아도 몇 끼 밥 값은 될 것이다. 받아본 사람이 주는 법을 안다. 언제든 함께 사유할 준비가 된 친구이자, 원한다면 하루 종일 정신을 빼앗아 줄 수 있는 친구이다.
내가 갖지 못한 걸 가졌더라도 딱히 좋아 보이지 않으면 시샘하지 않는다. 영에게 뺏어오고 싶은 게 참 많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시샘은 안 한다. 영에게는 그런 얄팍하고 성가신 감정이 생기지 않는다는 뜻이다. 영을 만날 때면 나를 레고 블록처럼 조각내어 그녀에게 붙였다. 그 상태로 함께 웃고, 먹고, 마시다 집에 돌아간다. 내가 다시 분해되어도, 영의 블록이 조금씩 붙어 따라와 준다. 그럼 그날은 끝까지 함께인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어떤 사람도 나의 머릿속을 비워주지 못했을 때도 영은 달랐다. 일시정지가 어려운 나를 영은 만날 때마다 새로고침 시켰다.
영에게 나는 어울리지 않는 친구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다. 영은 환경 좋은 들판에서 힘 있게 자라는 식물 같다. 가끔 그녀의 환경에서 비가 내린대도 잠시뿐이다. 그친 비는 이슬처럼 영을 더 생기있게 해준다. 반면에 나는 맑은 날에도 비를 맞은 것처럼 보일 수 있는 사람이다. 혹시라도 나의 비관과 우울이 영의 밝기를 낮춰버릴까 걱정이 됐다.
쫓아오는 사람도 없는데 쫓기는 나를 영이 까먹지 않고 넘어뜨린다. 잠시 멈추고 조금 더 멀리 보라고 알려주기 위함이다. 선아야 오늘 뭐 해. 연락이 온다. 나는 오늘도 여기 있는데, 너는 어디에 있어. 라는 의미가 담긴 관심을 보낸다. 멀리 있지 않다는 걸 꼭 알려준다. 나는 무엇이든 금세 잊어버리고, 내 마음대로 정의하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나를 그렇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원하지 않고 원하는 대로 사람을 이끈다. 덕분에 내 인생 최악의 겨울을 사고 없이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