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을 가기 위해 매일 아침에 타던 버스가 아닌 새로운 번호의 버스를 탔다. 처음 보는 풍경, 바쁜 사람들이 빠진 시간에 같은 버스를 탄 사람들을 관찰하며 나의 불안함과 긴장감이 어느 정도 가라앉는 듯했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받아들이자.' 큰 결심을 가진 채 병원 문을 열었다.
대기실은 조용하고 정돈된 공간이었으며, 공간 자체는 다른 병원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그러고는 가만히 앉아 있는 환자들을 살펴보았다. 괜히 그들의 얼굴에서 각자의 사연과 고민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소파 끄트머리에 앉아 대기하며 수십 가지의 질문이 있는 문진표를 작성했다.
"최근 밥맛이 없어져 체중이 줄어들었다."
'밥맛도 참 좋고 체중은 발레 덕분에 겨우 유지하고 있는데'
"최근 잠이 잘 오지 않는다"
'어제만 유독 못 잤지, 원래는 베개에 머리만 닿으면 자는데.'
조금은 아리송했던 문진표 작성을 끝내니 긴장감이 풀렸다.
"OO 씨, 이제 진료실로 가겠습니다."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가면서, 내가 그토록 두려워했던 순간이 드디어 현실로 다가왔다는 것을 느끼며 다시 긴장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방 안은 조용하고 아늑하게 꾸며져 있었으며, 선생님이 따뜻한 미소로 맞이해 주셨다. 나는 의자에 앉으며, 긴장된 목소리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OO 씨, 어떻게 오게 되었는지 저에게 자세히 설명해 주실래요?"
선생님은 마음을 열 수 있도록 차분하게 이끌어 주셨다. 깊은 심호흡을 하며, 그동안의 고민과 불안, 그리고 왜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를 솔직하게 털어놓기 시작했다.
"제가 원래는 굉장히 열정이 충만한 사람이었는데요..."
나의 이야기를 쭉 이어 나갔다. 이야기가 끝나자,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문진표만 봤을 때는 크게 문제가 없어 보이셨는데요, 이야기를 들어 보니 우울증까지는 몰라도 불안과 강박 증세는 있어 보이세요. 약을 처방해 드릴 수 있는데 어떻게, 괜찮으시겠어요?"
약은 아직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된 나였다. 또한 좀 더 확실하고 객관적인 진단을 원했기에 뇌파검사를 받기로 했다. 진료실 옆 검사실로 자리를 옮겼다. 두피에 붙일 수십 개의 전극과 전극을 잘 붙이기 위해 두피에 바를 크림이 보였다.
'머리가 상당히 떡지겠는걸...'
두피에 전극을 하나씩 붙일 때마다 차가움이 느껴졌다. 모든 전극을 붙이고 거울을 보니 내 모습이 웃겼다.
"검사 도중에는 움직이시면 안 되고, 아무 생각하지 않으셔야 해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아야 한다고 하니 잡생각들이 더 많이 떠오를 것만 같았다. 그렇게 검사가 시작되고, 정말로 아무 생각도 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어느덧 잡생각이 아예 없어지고, 중간중간 졸기도 했다(이래도 되는 건진 모르겠다).
뇌파 검사가 끝나고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또다시 긴장했다.
'만약 결과가 너무 안 좋게 나오면 어쩌지?' 걱정하는 사이에 결과지가 나왔다. 다시 진료실에 들어가 선생님을 뵈었다. 선생님이 결과지를 펼쳐 보이시며, 나를 안심시키기 위한 듯한 표정을 지으셨다.
"검사 결과가 굉장히 좋네요" 선생님이 차분하게 말씀하셨다.
"하지만, 이 검사 결과가 좋게 나왔다고 문제가 없다고 할 순 없어요. 다만 아직까지는 뇌가 버틸 수 있는 수준이고 제 기능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아요."
결과를 듣자마자 여태 쌓여온 검은 물체가 떨어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검사의 결과가 좋다는 말에, 마음속의 불안감이 완화된 것 같았고, 내가 생각보다 강하다는 사실에 나 스스로가 대견스러웠다.
검사 결과를 손에 쥐고 병원을 나서며,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일어난 변화의 시작을 실감했다. 검은 기운이 조금씩 물러가고, 새로운 긍정의 기운이 그 자리를 채울 것만 같았다.
앞으로 또 어떤 예상치 못한 도전이 찾아오더라도, 강한 나는 이제 그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검은 기운이 나를 짓누르던 시절이 있었지만, 그 기운에 맞선 경험 또한 있으니 회복탄력성이 생기지 않을까.
불꽃처럼 치솟는 열정에 집착하던 나는, 그 열정이 예상치 못한 형태로 변화할 때마다 저항하고 싶었다. 나는 열정이 항상 일정하고 통제 가능하길 바랐지만, 그럴때마다 그것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다. 마치 내 손에서 벗어나려는 불길처럼. 하지만 이제 나는 깨달았다. 나에게 적당한 열정의 형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내가 마주해야 할 것은 열정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어떤 형태로든 변화할 수 있다는 사실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