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생활기
익숙한 곳에서는 이미 관성대로 살기 때문에 무언가를 느낄 겨를도, 생각할 겨를이 딱히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낯선 곳을 탐험하게 되면 사소한 나의 감정까지도 캐치하게 된다. 이것이 여행의 묘미가 아닐까.
이전 화에 얘기했듯이, 프랑스에 와서는 거의 매일 누군가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그중에는 프랑스 토박이도 있고 아닌 사람도 있다. 몇몇과는 'WhatsApp'이라는 전 세계 카톡 같은 어플에 친구를 맺기도 했다. 그래서 오늘도 어김없이 나와 친구를 맺은 누군가가 메시지를 보냈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대화하고 싶지 않았기에 답장하지 않았다. 분명 그 사람 덕분에 한 때는 즐거운 시간을 보냈으면서 왜 그럴까.
오래 전의 나는 관계에 목을 매는 사람이었다. 친해지고 싶은 친구와 어떻게든 더 친해지려고 다른 일을 내팽개치고 그 친구와 놀러 가거나 하루 종일 끊임없이 연락하는 것이 나의 일상이었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불안한 사람이었다. 나의 삶이지만 나를 생각하지 않는 삶을 살았다. 거의 모든 결정이 타인에 의존적이었다. 그렇다고 배려를 잘하거나 너그러운 사람도 아니었다. 수가 틀리면 무자비하게 상대를 욕하기도 했으니까.
지금의 나는 아무것도 무조건적으로 믿지 않는다. 타인도 나조차도. 타인도 어제와 다를 것이고 나도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어제의 타인은 나와 맹목적으로 친해지고 싶어 했을지 몰라도 오늘은 다를 수 있다. 그리고 나 또한 어제는 그들 덕분에 풍부한 하루를 보냈지만 지금은 혼자 있고 싶을 수 있다. 사실 나는 대부분이 그렇다. 나는 사람과의 대화에 일정한 할당량이 있는 사람이다. 그 양이 채워지고 나면, 남은 시간은 오로지 나만의 사색으로 채우고 싶어진다. 그 순간에는 타인이 끼어드는 것을 굉장히 경계한다. 타인은 할당량이 덜 채워졌을 수도 있지만 어쩔 수 없다.
이런 나에게 한동안은 현타가 왔었다. 특히 프랑스 이전 혼자 여행했을 당시, 너무나도 외로워 그토록 사람과의 연이 닿기를 바랐으면서, 정작 연이 닿고 좀 더 깊어지려고 하니 회피하는 나의 성향이 당시에는 너무 이기적이고 모순되어 보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반복을 거듭하면서야 알게 됐다. 이 모든 모습이 바로 '나'이고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외로움을 피하고 싶어 하면서도, 깊어질수록 물러서고 싶은 이 양가성조차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