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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inter Oct 18. 2024

내가 좋아한 회사

 코로나로 떠들썩하던 시절, 한 게임 회사에 입사했다.

 첫 출근 날, 처음 들어가 본 사옥 로비는 굉장히 모던하면서 예뻤다. 회사의 로고나 이미지를 생각했을 때는 좀 더 아기자기하고 친근한 인테리어를 생각했는데 무채색의 조화로 이루어진 세련된 스타일로 꾸며져 있었다. 비싸 보이는 소파, 테이블, 벽지, 타일 하나하나 정성스레 고르고 관리한 것 같았다. 코로나로 인해 회사가 조용하니 이 세련됨이 근엄함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내가 향한 곳은 OT가 예정된 교실이었다. 배치도를 보고 찾아간 나의 자리 위에는 예쁜 회사 로고가 찍혀 있는 쇼핑백이 놓여 있었다. 그 안에는 컵, 볼펜, 노트북 받침대 등으로 구성된 입사 키트가 있었다. 정성스럽게 제작된 물품들을 하나하나씩 보며 이 조직의 구성원으로서 환영받는 느낌이 들었다. 오십여 명의 많은 사람이 한 교실에 모여있는 것을 보니 마음이 편해졌다. '나의 동기가 이렇게 많구나...' 아직 말 한 번 제대로 붙여보지 못했지만, 왠지 든든했다. OT가 끝난 후 같은 팀으로 배정된 동기들을 만났다.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조심스럽게 서로 인사를 건네었다.
"안녕하세요... OO팀으로 배정된 OO입니다"
순간 더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 몽글몽글한 이 느낌, 어디선가 느껴봤는데... 바로 대학교 OT였다. 대학 생활에 대한 설렘과 사람들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 찬 신입생들이 숫기 없이 서로에게 인사를 건네던 그때 그 느낌이었다. 목적 없이 순수한 호기심으로 사람을 대하는 게 오랜만이었던 나는, 이 상황이 너무 소중하게 느껴졌다.

 

 동기들과 얘기를 나누던 중 멘토님이 우리를 데리러 오셨다. 우리는 온라인 면접 때 본 사람이 실제로 등장하니, 마치 연예인을 본 듯 신기해했다. 연예인 멘토님은 우리를 사옥 이곳저곳으로 데리고 다니시며 시설과 복지에 대해서 설명해 주셨다. 나의 회사 뽕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당시 전사 재택 중이라 사옥이 조용했지만, 간혹가다가 보이는 IT회사 특유의 자유분방함이 느껴지는 분들을 구경하는 재미도 있었다. 화려하게 염색한 머리, 현란하게 꾸며져 있는 티셔츠, 이게 여기서는 가능하구나. 복장 규정 없이 일만 잘하면 상관없다는 마인드를 가진 회사도 멋져 보였고, 회사에서 개성을 표출하는 사람들 모두 능력자로 보였다.


'내가 이곳에서 이런 사람들과 함께 일하게 된다니...'


 데이터 분석가로 입사한 나는, 온보딩 기간 동안 여러 분석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각 프로젝트는 직접 게임을 플레이하거나 게임 데이터를 분석해서 문제 정의부터 해결 방안까지 도출하는 것이었다. 나의 실력을 발휘할 기회가 온 것이다. 늘 그래왔듯 데이터 속을 탐험하며 수많은 인사이트를 뽑아냈다. 하지만 회사에서 진행하는 모든 프로젝트는 일목요연하고 논리적으로 분석 내용을 정리한 리포트를 만드는 것이 관건이었다. 이 수많은 내용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막막했고, 내용 몇 개를 빠뜨리자니 그 내용이 너무 아까웠다. '분석 코드만 잘 정리하면 되지 문서 정리까지 잘해야 하나?' 하며 혼자 투덜거렸다.


 리포트 제출 기간점점 가까워지자, 멘토님께 자문했다. 하지만 멘토님은 명확한 솔루션을 주시지 않으셨다. 일단 내 스타일대로 할 수 있는 만큼의 정리를 해보라고만 말씀하셨다. 결국 처음 제출한 리포트는 내용이 너무 많아서 핵심이 흐려졌다는 피드백을 받았다. 쓴 피드백과 함께 그제야 멘토님이 원하던 리포트 포맷을 알려주셨다. 그때 나는 생각했다. '처음부터 알려 주셨다면 시간 낭비하지 않았을 텐데' 마치 내 생각을 읽으신 듯 멘토님이 이어서 말씀하셨다. "처음부터 이렇게 쓰라 했으면 그거대로 힘드셨을 테고 의구심도 드셨을 거예요. 한번 고생해 봐야 의미를 알죠" 그제야 멘토님의 의도를 이해하게 되었고, 불평했던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처음 쓴 리포트와 멘토님의 피드백을 적용한 리포트를 비교해 보니, 후자가 확실히 분석 내용을 더 돋보이게 하고 있었다.


 문서 작성까지 잘해야 하느냐며 투덜댔지만, 그날 이후로 더 이상 불평하지 않았다. 개발이든 분석이든, 결국 내가 한 일을 남들에게 제대로 전달하려면 깔끔한 문서 작성이 필수임을 깨달았다. 순진하게도, 그때부터 나는 우리 조직이 내게 하는 말, 내게 시키는 일은 누군가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기 시작했다. 이 기대는 나를 초몰입 상태로 이끌었다. 신입으로서는 알 수 없는 큰 그림을 그리는 선배들이 대단해 보였고, 그들의 인정을 받고 싶었다. 그래서 더 잘하고 싶었다.


 입사 후 일 년 동안 거의 빠짐없이 새벽 4시 반에서 5시 반 사이에 일어났다.


 이른 아침에 일어나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커피 물을 끓이는 것이었고, 이어서 노트북을 켜고 노트 하나와 펜을 준비했다. 하얀 무지 노트에 전날 내가 작성했던 리포트의 구성 요소를 하나씩 분해하여 분석하는 시간을 가졌다. 개요 부분에서 문제 인식 및 도출 부분은 누가 읽어도 이해되는지, 해당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세부 목표는 타당한지 등을 먼저 점검했다. 본론 부분에서는 무아지경으로 적어 내려갔던 분석 내용 중 목적과 목표에 어긋나는 내용은 없는지를 면밀히 검토했다. 이 새벽 시간은 나의 논리를 분석하고 개선하는 시간이었으며, 해가 뜰 즈음이면 더 논리적이고, 깔끔하게 정리된 흐름이 완성되었다. 나는 이 내용들을 빨리 출근해서 적용하고 싶어 들뜬 마음으로 출근 준비를 했다.


 주말에도 내 머릿속은 '어떻게 하면 일을 잘할 수 있을까'로 가득 찼다. 아무래도 본격적으로 분석을 시작하면 게임 도메인 지식이 필요할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중학생 이후로 게임을 즐겨 하지 않는다. 이 점이 나의 약점이자 한계라고 생각했다. 사실 이 부분 때문에 주눅 들기 싫어서 면접 전 일주일 동안 매일 피시방에 출석해 세 시간씩 회사 게임을 플레이하며 도메인 지식을 얻는 시간을 가졌었다. 다시 그때의 불안감이 몰려왔다. 그래서 주말 밤 회사 대표 게임을 공부하려고 홈페이지에 들어갔다. 홈페이지를 탐험하면 할수록 내가 알아야 할 것들이 너무나 방대해 보여 자신감이 줄어들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맞을까?' 깊은 고민에 잠겼다.

밤 9시, 나는 용기를 내어 사내 메신저로 멘토님께 메시지를 보냈다.


'제가 하게 될 일이 궁금하여 게임 홈페이지를 들여다보니, 도메인 지식이 있어야만 분석을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앞으로 제가 일을 잘하기 위해서는 도메인 지식을 우선적으로 길러야 할까요?'


 주말 밤임에도 멘토님이 곧바로 답장을 주셨다. 게임 도메인 지식은 필수적이진 않고 세세한 현상을 정의하기보다 문제를 일반화하고 해결책을 찾아내는 능력이 더 중요하다고 말씀 주셨다. 답변을 받고 나서야 비로소 마음이 편해졌다. 그 능력을 기르기 위해 어떤 공부를 해야 할지 감이 잡혔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지나 알게 된 사실이지만, 멘토님은 그날 내가 보낸 메시지를 감동적으로 생각하셔서 캡처해 두셨다고 한다. 그 메시지는 나의 열정과 진정성을 보여주는 상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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