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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아 Aug 08. 2024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려면 아픔은 감내해야 해

석 대신에 만난 스페어는 병원장이라고 했다. 나는 27살, 그는 37이었다. 팬시한 식당에서 밥을 먹는데 그는 말했다.

"선을 봤는데 그 여자가 결혼하자고 해요. 하지만 제가 왜 그 여자와 결혼을 해요. 나이가 비슷해요. 어린 사람 만나고 싶어요."

그는 안경을 꼈고 뚱뚱했고 느끼했다. 구김살 없는 셔츠 안으로 데이저스트가 보였다. 기블리를 타고 2차로는 하얏트 jj에 갔다. 발렛은 정중했고 지하로 들어가니 밴드가 연주하고 있었다. 천천히 사람들을 구경했더니 나와 비슷한 여자애가 50은 되어 보이는 외국인과 진한 스킨십을 하고 있었다. 그와 함께하는 시간은 5분이 한 시간 같았다. 대화는 화제를 찾지 못하고 빙빙 돌았으며 계속해서 나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 내 눈은 둘 곳이 없었다.

"이제 가봐야 할 것 같아요"라고 말하니 그는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데려다주는데 그가 손을 잡았다. 역겨웠지만 내 손은 그의 손에 덮였고 곧 기분 나쁜 땀이 스미는 게 느껴졌다.

만나고 싶은 사람을 못 만나고 만날 수 있는 사람을 만나서 우울하게 집에 가고 있는데 석에게 전화가 왔다. 받지 않았다.


 다음날 이유를 물어보니 내가 있는 곳으로 오려고 했다고 했다. 그를 만나기로 한 날은 멀리서 그가 걸어오는데 너무 좋아서 두 팔을 벌리고 안아주었다. 그리고 그가 더 좋아져 버렸다. 그는 그러나 너무 바빴다. 일을 세 가지나 하고 있다고 했다. 이해하려고 노력했지만 어려웠다. 원한 건 다른 게 아니었다. 함께 강을 보고 싶었고 함께 꽃을 보며 꽃이 피었다고 하고 싶었다. 그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와 간 곳은 망원동이었다. 홍대와 이어져 있는 그곳에서 특별한걸 한건 아니었다. 그냥 길가의 조그만 가게에 가서 밥을 먹고 나와선 손을 잡고 다녔다. 그와 길을 걷는 것만 해도 세상이 내게 레드카펫을 깔아준 기분이었다. 행인들이 우릴 보지 않아도 마치 그들이 우러러보는 것 같은 환상이었다. 거리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들로부터 축하받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와 골목골목을 돌아다녔다. 길이 어떻게 이어져 있는지 모르지만 그저 그를 따라다니는 것만으로도 길은 끝없이 이어졌다. 그를 보고 있으면 갈망하게 됐다. 좋아하는 사람과 아닌 사람을 구별하는 건 약속이 있을 때 나가기 전 마음이었다. 좋아하는 사람을 만날 때는 가기 며칠 전부터 설레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옷을 어떻게 입어야 할지를 생각하느라 카운트다운을 하게 됐다. 그리고 그날이 하루라도 빨리 왔으면 좋겠다는 기대감이 만발했다. 하지만 으레 만나야 하는 사람을 때가 돼서 만날 때는 그 시간이 기다려지지 않았으며 날이 다가올수록 귀찮다는 마음이 컸다. 그를 만나는 시간에는 마음껏 그를 향유하다가 헤어지고 나면 다시 혼자가 된 것 같았다. 할 수 있다면 그와 매 순간 매일을 같이하고 싶었다.


그와 특별한 대화를 나눈 것도 아니었다. 그냥 무슨 일이 있었고, '저기 상점이 있네'이런 일상적인 말을 하면서 쇼윈도에 비친 그와 나를 보고 나조차도 감탄했다. 그와 나는 너무 잘 어울렸다. 그런 멋진 사람 옆에 내가 있는 게 좋아서 그의 몸에 나를 밀착시키고, 계속 만지고 싶었다. 그도 대체로 그런 나의 요구에 응했고 그가 사람이 없는 곳에서 키스를 해주는 그런 것들은 '그도 나와 같은 마음일 거야'라고 인지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를 만나면 진지한 이야기나 미래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하지만 그런 게 없어도 서로를 탐닉한다는 것 자체만으로 사랑이 아닐까 확신하게 됐다. 나는 그를 원했다. 그도 나를 '원하는 것처럼' 보였다. 세 시간을 같이 있었지만 30분같이 체감하고선, 그는 버스정류장까지 나를 데려다주었다.


정류장은 동교동에서 인천 가는 방향이었고, 막차시간이 가까워지자 나 말고도 귀가를 서두르는 인파로 빼곡했다. 1400번을 기다리고 있는데 헤어지는 순간이면 불안했다. 그는 만날 때면 세상에 둘밖에 없는 감정을 느끼게 해 주었지만, 헤어지고 나면 연락이 잘 되지 않았다. 그럼 나는 오지 않는 그의 연락을 기다리면서 생각하지 않아도 될 것까지 망상하다 결국 마음이 타버린 재처럼 돼버리곤 했다. 그에게 그런 나의 마음에 대해 이야기하진 않았다. 그건 어쩌면 자존심 때문이기도 했다. 그보다 내가 그를 더 사랑한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기도 했고 그런 말을 하면 이미 굽히고 들어가는 것 같았다. 사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미 그와의 관계에서 '함께 있는 것'으로부터 과도한 만족감을 누리고 있었고, 그런 사람을 만나려면 내가 겪는 마음의 아픔이라든지 불충족되는 부분은 감당해야 한다고 은연중에 생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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