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크숍을 간 곳에서 회사 직원들과 저녁식사를 했다. 굳이 가지 않아도 되는 자리였지만 최근 혼자 여행이라든지, 혼자 밥을 먹는 등의 시간이 많아서 오랜만에 참석한 것이다. 사람에게는 망각이라는 좋은 재료가 있듯이, 하도 회식에 참여하지 않다가 참여한 1차는 의외로 괜찮았다. 나보다 낮은 연차의 직원들과 함께였지만, 맹세코 그들에게 조언이나 충고를 하지 않았다. 좋은 회식의 표본은 상사가 말을 많이 하지 않고 직원들이 하고 싶은 말을 자유롭게 하는 데 있다.
처음부터 이렇게 회식을 싫어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처음엔 평소에 먹을 수 없는 음식을 회식을 통해 먹는다는 기쁨조차 있었다. 하지만 회식에 대한 트라우마를 갖게 된 건 지난 10년의 회사생활 때문이었는데, 상사가 먼저 가겠다는 직원을 뺨싸대기를 때리며 '갈 거면 먹고 가라'한 것이라든지, 회식 때 본인 양옆을 여성으로 앉히는 개꼰대 낙하산 원장 때문에 아예 싫어져 버렸다. 이런 사건들이 '나'와 관련되지 않았다면 나도 이렇게까지 싫어하진 않을 테지만, 원장이 모든 직원들 앞에서 내 능력을 폄하하는 말을 하거나, 그들 중 누구도 그 말에 디펜스 해주는 사람이 없단 것은 인간에 대한 염증을 느끼기에 충분했고 그런 자리는 윗사람의 즐거움을 위한 자리 그 이상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회식 프로불참러가 되었다.
2차를 갈 사람은 306호로 오라고 해서 간 거실엔 20여 명의 사람이 모여 있었고, 그들 중 누구는 안면이 있기도 했고 누구는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아 역시 오면 안 됐다고 생각한 건 건배사 때문이었다. 분위기를 애써 띄우려는 공치사나 파이팅 으쌰 으쌰는 나만 그 자리에 적응하고 있지 못한 건지 다른 사람은 기막힌 건배사를 읊었다. 10년 짬인 내게 건배사를 시킬까 싶었지만 그 자리는 가장 최고봉인 보스조차 일필휘지로 건배사를 말하고 있었고 차례는 내가 되었다. 외워둔 건배사가 있었지만 상황과는 동떨어진 문구여서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짓다가 못하겠다고 하고 말았다. 다행히 다음 순서로 건배사는 옮겨갔고, 분위기는 고조되었다.
하지만 내가 정작 불편했던 건 옆자리에서 끊임없이 말을 붙여오는 한 남자 때문이었다. 처음 봤는데 그는 내가 술을 먹겠다는 의사표시를 한 것도 아닌데 맥주를 따라주었다. '저 술 못 마셔요'라고 했던 건 그냥 하는 말이 아닌 정말 약을 먹고 있어서 못 먹었다. 하지만 그는 '시늉만 해요, 내가 보니까 안 먹는 것보다 척만 하는 게 낫더라고'하며 밑잔을 깔아주었다. 그것까진 괜찮았는데, 이야기는 그도 솔로며 어쩌다 가정 이야기가 나와서 그가 '가정 있으세요?'라고 물었고 '아뇨'라고 대답하자 사는 곳을 묻고 이야기가 개인적인 이야기로 흘러간 것이었다. 그는 전혀 내 스타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게 이성적 호감이라는 건 지난 축적된 데이터로 알 수 있었고 자리를 정리하려던 차에 슬그머니 방으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 세미나실에 가니 그는 역시나 출석사인을 하고 있는 내 옆에 와서 '아 사인을 해야 하는구나'이러며 아는 체를 했다. 대꾸할 수도 있었지만 그럴 가치도 못 느껴 그냥 자리로 되돌아왔다. 혼자 살겠다는 결심이 내 스타일이 아닌 사람이 대시하는 경험으로 이어질 땐 '다른 사람의 차단을 막기 위해서라도 누군가를 옆에 둬야 하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게 만들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