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차곡차곡 접어두었던 서랍의 물건을 불현듯 '이런 게 있었지' 찾는 기분으로 예전일이 기억이 났다. 그와의 관계는 모든 순간이 일상적이었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고 실제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와 차를 마시고 이야기를 하고 그의 집에 가는 모든 순간이 지극한 평범속에 머물렀다.
그도 그런 자신의 평범을 알았는지, 그의 가장 친한 친구가 의사 둘이고 일본 여행을 같이 간다고 말하곤 했다. '그의 평범함을 친구로 가리려고 하는구나'라는 걸 알았지만 내가 평범하다고 생각한 그 또한 객관적으로는 평범하진 않았다. 좋은 대학 나와서 대기업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는 것도 평범이란 범주에 속하지는 않는 것이었지만 (당시) 내 기준에선 그랬다.
좋은 집안에서 잘 자라서 아우디를 끄는 아버지와 철이 없어서 안면거상술을 받는 그녀의 어머니의 일원이 된다는 걸 상상해 본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에 대한 감정은 사랑이 아님을 생각할수록 알 수 있었다. 그저 서로의 필요에 의해 만난 관계였다. 나는 세 번 만나고 그가 고백했을 때 '이 정도면 거절한 명분이 없어서'그를 수락했고 그도 남에게 보이기 좋은 여자라서 단 3번의 만남으로 만나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한 번은 그의 집에 갔는데, 그가 씻으러 간 적이 있었다. 나는 그의 오피스텔에서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는 그의 공간을 구경하며 2인용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 순간 내가 항상 보던 그의 핸드폰이 아닌 예전에 쓰던 폰인지 다른 모양의 핸드폰이 있었다. 그건 마치 판도라의 상자처럼 열면 안 될 것 같았지만 본 이상 열지 않을 수도 없을 것처럼 생겼었다. 그걸 열자 그건 마치 거짓말처럼 비밀번호도 걸려있지 않았고 거기엔 그가 예전 여자친구로 추정되는 사람과 한 카톡이 삭제도 되지 않은 채 고스란히 있어서 그가 일부러 보라고 놔둔 건가 하는 환각까지 일었다.
그건 너무 충격적이어서 단숨에 그 둘의 카톡을 읽어 내려갔고 그게 너무 괴이해서인지 아니면 기억할만한 가치가 없어서인지 지금은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연인 간의 너무나 평범해서 그렇고 그런 대화였을 것이다. 그는 내게 하던 것과 같이 그녀에게도 자상한 모습을 보여줬었다. 하지만 그걸 보고 난 이후 그가 아무것도 모른 채 욕실에서 나왔을 때 나는 그전의 나와 같은 내가 될 수 없었다.
얼마 되지 않아 그와 나는 헤어졌다. 그가 의사인 친구와 일본을 다녀와서 전리품처럼 안긴 백만 원 치의 선물은 나를 놀라게 했지만, 그건 물건을 소유했다는 느낌 때문이었지 그에 대한 사랑 때문은 아니었다. 내가 얼마 되지 않아 홍콩으로 친구와 여행을 다녀왔을 때 나는 거짓말처럼 그 생각이 하나도 나지 않았다. 그는 돌아와서 말했다. '어쩌면 연락을 그렇게 안 할 수 있어?'그는 비난하듯 내게 말했고 나는 건조하게 그에게 말할 뿐이었다. '헤어지자 우리' 그는 한동안 말이 없었고 그는 일주일 뒤에 연락해서 헤어지자고 했다. 갑자기 생각난 지난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