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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아 Nov 22. 2024

칼을 선물한 친구

한때 나와 친하던 대학동기 S는 도루코에 다녔다. 마케팅부서에서 일하던 그녀는 사람과 일을 조율하는 게 가장 힘들고 진 빠진다고 했다. 그런 하소연을 들어주기도 여러 번이었다. 이상하게도 그런 말을 들으면 '나만 악조건에서 일하는 게 아니구나'라는 안도감이 들었다. 그래서 퇴근 후 피로에 절여진 몸이라도 그녀의 전화는 한 시간 이상 붙들 수 있었다.


그녀와는 팬시한 곳을 많이 갔다. 여자들끼리의 감각으로 그녀는 내게 어느 정도의 동경을 갖는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누구를 만나도 그와의 우열감이나 그런 것들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가 있다. 서로가 완벽히 동등한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느 측면에서도 꼭 누군가는 관계의 우위를 점하고 있는데 그게 그녀와의 관계에서는 나였다.


이유는 굳이 말하자면 번화가에 나갔을 때 그녀보다 많이 받는 대시라든가, 누군가와 합석해서 앉았을 때 상대방 둘이 모두 내게 관심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등으로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도 그런 내가 아니면 그런 한여름밤의 꿈같은 허망함조차 잡을 수 없단 걸 알았는지 그런 우리의 관계는 계속되었다. 평일에는 회사 욕을 하다가 주말에 만나면 밤을 소비하는 관계.


그런 우열 때문이었는지, 우위에 취해 순간 내가 보이던 그녀에 대한 정성을 다하지 않는 무심함 때문이었는지, 서서히 금이 가고 있었다. 그걸 둘 다 알고 있었지만 결정적인 사건은 없었으므로 그건 꾸역꾸역 이어져 갔다. 나는 트렌디한 곳에 가서 그녀와 대화하며 행복감을 타인에게 보여줄 수 있었고, 그녀는 그런 나로 인해 돋보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언젠가 나는 칼이 무뎌졌고, 그녀에게 회사에 남는 칼이 없느냐며 달라고 한 적이 있었다. 그녀는 말이 끝마치기 무섭게 가위와 칼을 택배로 보내왔다. 그 물건을 쓰며 '그래도 좋은 점이 있네'라고 했을 땐 그녀와의 사이가 칼처럼 잘릴지 몰랐다. 하지만 그녀와의 사이는 파멸에 치달았고, 아직도 그것이 그녀가 준 칼 때문이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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