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조된 모임이었다. 보통 할머니를 찾아가는 일은 자식들이 번갈아가며 주에 한 번씩 가는데, 그날은 큰삼촌이 가는 날이라고 했다.
'할머니 생신이라며, 다 같이 가야 하는 거 아냐?'
'그날은 큰오빠가 온대서'
라며 내 집에 오겠단 엄마에게 '알았다'라고 했다. 숙모를 배려한 엄마인 건지,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서 그런 건진 모르겠지만 마침 엄마도 보고 싶었기 때문에 오라고 한 것이다. 성인이 되고 본가에 가지 않기 때문에 엄마는 반찬을 준다는 핑계로 2달에 한 번씩은 우리 집으로 오는 것이다.
하지만 그날 단톡방에는 다시 천안 요양원에서 모이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다만 모든 사람의 일정을 고려하다 보니 시간이 저녁시간이었고, 보통 점심에 모이는 것과 다른 것으로 보아 엄마가 바로 본가로 돌아가긴 어려울 것 같고 우리 집에서 자기로 했다.
엄마는 당일이 되자 마음이 급했는지 아침부터 길을 나섰다. 그렇게 길을 나서면 점심에 세종에 도착한다는 걸 알고 있는데도, 빨리 엄마의 엄마를 보고 싶었던 것이리라. 역시 분가를 해서 살고 있는 여동생과 만나서 저녁에 천안터미널에 도착하게 오라고 했는데도 길을 먼저 출발해 버려서 엄마는 고속터미널에서 세 시간을 여동생을 기다려야 했던 것이다. 시간이 지나 터미널에서 만났을 때도 엄마는 기다렸다는 것에 대한 원망의 기색이나 불편이 없고 어서 빨리 할머니에게 가야 한다는 일념뿐이었다. 그건 내가 여동생을 픽업하기 위해 통화했을 때 건너편에 들려오는 엄마의 '응 지금 가고 있어'라는 다급한 전화로 알 수 있었다.
가기 전에 노점에서 '엄마 스카프 사줄까?'라고 말했을 때도 '어서 가야지'라고 재촉하기만 하는 엄마는 이 세상에 할머니를 보는 것 외에 중요한 건 없다는 태도로 일관했다. 그렇게 도착했을 때 할머니는 오매불망 엄마를 기다리고 있었고 생일파티는 시작되었다.
가족들이 모이면 여자들이 항상 고생하기 때문에 그날은 음식을 포장해 와 먹기로 했다. 그렇게 하니 꽤나 편했다. 그날 모인 이유는 전날 요양원에서 생일파티를 했는데 할머니가 역정을 내셔였다.
'나 빨리 죽으라고 생일파티 하는 거야?'
라고 성을 내셨는데, 그런 의도가 어르신들을 모아 생신을 축하하는 자리임에도 할머니는 그게 고깝게 보이지 않고 화가 나는 모양이었다. 숙모는 '식사를 대접했는데도 밥을 안 줬다고 뭐라고 한다'라고 속상해했다.
이제 구순이 된 할머니는 묫자리가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며칠새 할머니가 내내 말한 건 '할아버지 묏자리 옆에 자리가 없는데 내가 어떻게 들어가냐'라는 것이었다. 숙모가 '자리해놨으니 걱정 마세요' 했는데도 할머니는 그것만이 걱정인양 몇 번이 곤 그 얘기를 하는 것이었다.
삼촌은 놀아본 어르신이 요양원 생활도 더 잘한다고 했다. 젊으실 때 삶을 즐긴 분들은 별다른 이벤트가 없어도 노래도 부르고 잘 지내는데, 할머니같이 평생을 일만 한 사람은 노는 걸 몰라 그런 시간이 주어졌을 때 삶의 방향을 잃게 된다고 했다.
그날 온 가족이 모여 케이크에 초를 붙여드리자 할머니는 만면에 웃음을 피우며 전날 본인이 역정을 냈는지는 까맣게 잊은 것 같았지만 역시 초를 끄자 묫자리 이야기를 계속했다. 이럴 때면 할머니를 보내고 싶지 않은데 자기는 이미 죽을 준비를 다 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프다. 어르신들이 나이가 들면 수의를 손수 준비하는 것처럼 죽음을 준비하는 태도는 이해가 되는데 내 마음에선 그걸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