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핵심 철학 중 '업보'가 있다.
과거 혹은 전생의 선행과 악행의 결과는 결국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것이다. 현생에서 없애지 못한 업보는 다시 태어나 갚는다. 업보가 소멸될 때까지 윤회한다. 자업자득의 원리다.
약하고 무책임한 나는 힘들 때마다 '죽음'을 생각한다. 하지만 실천하지 못한다. 이미 쌓인 업보를 감당하지 못해 지금 이리 허둥대는데 '자살'이라는 커다란 업보를 다시 쌓는 게 두렵기 때문이다.
힘듦, 괴로움, 저 세상에 대한 용기는 결국 '두려움'에 진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일제강점기를 다룬 드라마를 보다가 만약에 전생이 있다면, 그리고 전생에 내가 일제강점기에 조선에서 살았더라면 친일파로 살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몸이 괴로우니까. 마음이 무겁더라도 친일을 택하지 않았을까...라고 어렴풋이 생각했다.
그런데 어떤 브런치 작가님의 '전생에 악을 행한 사람이 장애인으로 태어난다.'며 친일파를 예시로 든 글을 읽으니 '내가 정말 친일을 했었겠구나.' 싶었다. 글의 내용을 모두 다 공감하진 않았지만 친일까지는 아니더라도 갚아야 될 업보가 있어서 몸이 아프게 태어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장자와 성경에는 각각 이런 말씀이 있다.
성인불유 이조지어천(聖人不由 而照之於天)
성인은 시시비비를 가리는 대신 하늘의 이치를 따른다.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자신의 어리석음과 세상의 이치를 모두 알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말고
하늘의 뜻으로 생각하고 살라고 하는 장자의 이론이나
할 일이라면 하기 싫어도 기어코 해내며, 하지 말아야 할 일이라면 아무리 하고 싶어도 꾹 참아야 되는
십자가를 진 삶을 살아야 된다는 것이다.
지금 내게 주는 하늘의 가르침, 힘들게 짊어지고 있는 십자가는
모두 자신의 업보에서 기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불교의 업보, 장자의 시시비비, 성경의 십자가의 의미는 비슷하다.
누구나 자신만의 십자가가 있다.
그 십자가는 다른 이가 대신 짊어질 수도 없다.
하지만 십자가를 무겁게 만든 사람은 바로 자신이니
시시비비를 가리지 말고 그저 묵묵히
자신만의 십자가를 지고 한발 한발 어렵게 나아가야 된다.
삶 속으로. 업보가 사라질 때까지.
그렇게 오늘도 한발 내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