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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할 수 있는 고통

by 이서진

김영하 작가의 산문집 <단 한 번의 삶>에 트레드밀 에피소드가 나온다.

러닝머신은 원래 19세기 영국에서 죄수들에게 중노동을 시키기 위해 고안된 고문기구였다. (중략)
좁은 공간에서 아무 의미 있는 목적 없이 하루 여섯 시간이나 돌려야 하는, 지루하고 단조로워서 더 고통스러웠던 이 고문 기구는 19세기말이 되면서 더 비인간적인 방향으로 '개조'되었다. (중략) 그로부터 오십여 년이 흘러 트레드밀은 심혈관계 환자들의 건강 개선을 위한 의료용 기기로 다시 세상에 나타난다.

같은 트레드밀인데 왜 누군가에겐 고문기구로, 다른 이에겐 의료용 기기로 인식되는 것일까? 그에 대해 김영하 작가는 아래와 같이 말한다.

단순히 교도소라는 환경 때문에 트레드밀이 고문 기구가 된 것은 아니었다. 의미를 찾을 수 없는 고된 노역, 스스로 멈출 수 없다는 데서 오는 공포가 수감자들을 압도한 것이다. 운동기구가 된 트레드밀 역시 인간에게 고통을 부과하지만 그것은 인간이 스스로 선택한 것으로, 어떤 강도로 얼마나 오래 지속할지를 직접 결정할 수 있고, 언제든지 중간에 내려올 수 있다. 이렇게 스스로 부과하는 고통은 성장과 변화의 동력이 된다.

고통을 자발적으로 선택하기 위해선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보장돼야 한다.


우리 사회에 특히, 회사 생활에 개인의 선택권과 자율성이 아주 조금만 부여된다면 훨씬 더 자발적으로 일 할 수 있지 않을까.

예를 들면, 무슨 일이 있어도 일 년에 이삼일쯤은 원하는 날에 쉴 수 있다든지

하루 중 30분은 눈치 보지 않고 원하는 것을 하며 쉴 수 있다는 것 등이다.

365일 중 2~3일, 24시간 중 30분처럼 보잘것없을 만큼 작은 자유가 확실하게 보장된다면 회사에서의 시간이 노동의 시간으로만 느껴지지 않고 성장하는 시간으로 느껴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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