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봄부터 소설 합평 수업을 듣고 있다. 내가 쓰고 있는 글이 과연 '소설'이 맞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합평수업은 예상외였다. 문우들은 '너무 좋아요, 잘 읽었습니다.'처럼 형식적인 감상평 대신 구체적이고 세밀한 부분을 지적해 줬다. 초보가 채우기엔 어려운 원고지 80매 분량을 겨우 채웠지만 여기저기서 쏟아지는 비판에 처음엔 상처받았다. 서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수업이 점점 진행되면서 그것이 상대방 글에 대한 예의라는 것을 알았다. 꼼꼼한 합평은 결코 저렴하지 않은 합평 수업료를 기꺼이 지불하고 수업에 참여한 글친구를 위한 것이었다. 상대방이 적은 소설을 최대한 자세히 읽어주는 것. 제목이 전체 글의 내용과 어울리는지, 등장인물의 쓰임이 적절한지, 급작스럽게 마무리되진 않았는지, 사건의 흐름이 자연스러운지 등. 심지어 개선방안을 제시해 주는 고마운 문우님도 계셨다.
"그런데 제가 이런 우울한 글을 읽고 공감해야 될 이유가 있을까요?"
합평 수업 때 내가 받은 질문이다. 순간 멍해졌다. 사람들은 삶이 힘드므로 굳이 영화나 드라마, 소설에서까지 우울함을 느끼고 싶지 않아 한다. 나조차도 우울한 영화보단 해피앤딩으로 끝나는 영화를 좋아하니까. 내가 적은 소설뿐 아니라 브런치에 올라온 글이 외면당한 느낌이었다. 그날은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자기 전 침대에 누워 브런치스토리에 올라온 다른 작가님들의 글을 읽어봤다. 투병 중인 분, 자녀가 아픈 분 등 여러 아픔이 글에 담겨 있었지만 거부감이 느껴지진 않았다. 오히려 위로받는 느낌이 들었다.
같은 슬픈 글인데도 독자에게 위로와 공감을 주는 글과 불편한 마음을 주는 글의 차이는 무엇일까. 전자는 슬픔의 개연성이 뒷받침된 글이고 후자는 그렇지 않은 글일 것이다. 소설로 말하면 '플롯'이 얼마나 촘촘히 짜였는지의 문제일 것이다.
"나는 슬플 때 글을 쓴다. 그때야말로 가장 진실한 나이기 때문이다."
– 실비아 플러스 -
아마 내가 앞으로 쓰게 될 글의 분위기는 대부분 어두울 것이다. 슬픔에 묻혀버리거나, 도망가거나 아니면 슬픔을 극복하는 인물의 태도에서 삶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게 된다고 생각한다. 이겨내기 힘든 슬픔이 닥칠 때 인간의 본모습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만, 허술한 플롯은 극복해야 할 과제 중 하나다.
우울한 글을 읽고 공감해야 될 이유는 없지만 어쨌든 누군가 내 글을 읽게 된다면, 공감받을 수 있는 글을 적고 싶다. 앞으로 내가 쓰게 될 글의 방향을 잡아 준 문우님께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