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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진 May 31. 2021

외로움, 아버지의 숙명!

아버지는 외롭다. 


‘아버지’라는 역할에 비해 가족과의 친밀도는 낮은 집이 많다.

아버지에게는 ‘가장’이라는 직위와, 그 직위를 지키기 위한 ‘권위’가 함께 부여됐다.

그 권위를 잃지 않기 위해 세상의 수많은 아버지들은 외로움을 감수한다.

 

언제나 내 마음속 첫 번째인 엄마와는 달리 아버지들은 이것저것 노력해도 후순위로 밀려난다. 

그만큼 엄마의 존재는 누구에게나 절대적이고, 아버지는 아쉽지만 상대적이다.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적는 지금도 엄마 얘기를 안 할 수 없으니 아버지가 서운함을 느끼는 것도 당연하다.


우리 집에 장가 온 남자들은 대부분 남다른 숙명을 부여받았다.  부엌일은 주로 남자가 해야 된다는 것이다.

남편은 신혼 초 이런 분위기를 낯설어했다. 하지만 장인어른이 주방에서 요리를 하고 있는데 가만히 앉아 있기 불편해하며 조금씩 도와주다가 보니 이제는 먼저 나선다. 이런 식으로 형부도, 아버지도, 또 외할아버지도 … 대대로 내려온 가풍을, 숙명을 받아들였다. 


원래 타고난 착한 성품, 젠틀한 이미지의 서울 남자, 여리고 약했던 부인, 거기다가 딸만 둘, 남자가 부엌일을 해야 되는 가풍까지.... 아버지가 부산에서 내로라하는 가정적인 남자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충분했다. 


내가 학생이었을 때, 

아버지는 맞벌이로 고생하는 엄마 대신, 나와 언니의 점심과 저녁 도시락 4개를 매일 새벽에 싸주셨다. 

주말에도 일을 해야 되는 엄마를 대신하여 아버지는 청소, 밀린 빨래를 하느라 일요일까지 바빴다.


집안일에 대한 기여도를 따지면 엄마보다 아버지가 더 높았고,

딸내미만 둘인 아버지답게 무척 자상했지만 난 아버지가 왠지 서먹했다.

아무 일도 없는 일상을 엄마에게는 재잘재잘 얘기했지만 아버지에겐 중요한 공지사항만 전달했다.


엄마의 생일 선물을 고를 때는 엄마의 취향, 유행하는 스타일, 나와 함께 쓸 수 있는 물건인지 등 여러 가지를 고려하여 고르고 골라 예쁘게 포장하여 살갑게 드리지만 아버지의 선물을 선택하는 것은 너무 어렵다. 

아버지가 무엇을 좋아하시는지, 장년의 남자에게 어떤 물건이 필요한지 도통 아는 것이 없고, 알려고도 안 했다. 그래서 늘 두껍지도 않은 현금봉투만 달랑 드린다. 현금을 제일 좋아하시는 아버지가 원하는 선물을 잘 드린 거라며 나 혼자 만족했다. 


귀하게 키운 딸에게 결혼할 남자가 생겼다는 소리를 들은 아버지의 심정은 어떨까? 예비사위를 처음 본 후, 아버지는 3분쯤 침묵하더니 밥 먹으러 가자고 했다. 한참 후, 아버지가 예비사위에게 처음으로 꺼낸 말씀은 ‘잘 살아라.’였다. 그리고 쭉 아무런 말씀이 없었다. 


그런 아버지였지만 나의 장애를 사돈 댁에서 걱정한다는 말을 듣고는 조용히 눈물을 흘리셨다. 그리고 내게 말했다. ‘파혼, 아무것도 아니다. 그냥 아버지랑 같이 살자.’ 예비사위가 아무리 잘 못 했다고 빌어도 소용없었다. 아무것도 바라는 것 없고 딸을 아껴주길 바랬는데... 제일 소중한 딸의 마음을 다치게 했으니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그 후 몇 년이 지났다. 사연과 상처가 많았던 나의 결혼을 다시 허락할 때도 아버지는 크게 말씀이 없으셨다. 다만, 한 동안 끊었던 담배를 다시 태우셨다. 


지금도 아버지는 우리 부부의 일에 크게 관여하지 않는다. 

 "너희 둘만 재밌게 살면 돼!"라고 말씀하실 뿐이다.


이 정도가 내가 아버지에 대해 갖는 추억이다. 

어쩌면 엄마보다 더 무거운 마음으로 가족을 돌봤을 텐데 추억하며 적을 게 없어서 죄송하다. 

하지만 나도 모르게 엄마에 대한 추억마다 아버지도 스며들어 있을 것으로 믿는다. 

함께 울고 웃는 아내와 두 딸을 보며, 

그녀들이 마음 놓고 기뻐하고 슬퍼할 수 있는 가정을 만들고 지키느라 애쓴 아버지…

아버지를 조용히 사랑하고 존경할 뿐이다. 


바닷가의 파도는 밀려 나가고 다시 돌아오고를 반복한다. 

순간순간 백사장을 적시고 있는 바닷물의 양은 다르지만, 

긴 시간을 보내고 다시 돌아봐도 바다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태풍이 올 때는 바다의 파도가 높아지고, 썰물 때는 저만치 물이 빠져 버리지만 

긴 세월을 묵묵히 있는 바다가 아버지와 비슷하다.


한여름 피서철에 그 많은 사람들이 올 때도, 

한겨울 차가운 칼바람에 아무도 찾아오지 않을 때도,

한결같이 그 자리에 있는 바다는 아버지와 닮았다.


넓었던 아버지의 어깨가 점점 좁아진다. 

무겁기만 했던 아버지의 '외로움'도 덜어드려야겠다.


여름이 오기 전, 아버지와 추억 하나를 더 만들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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