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공동의 빚, 니가 내 원수다

by 장미

막내 외삼촌이 자신이 알고 있는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누님이 열아홉에 혼인하신 건 맞다. 처녀 공출이 시도 때도 없이 들이닥치던 때여서 외할아버지가 더 서두르셨지. 외갓집은 너도 알다시피 살만큼 사는 데다 인심도 잃지는 않고 살았다. 누님이 딸이라고 외할아버지가 글을 안 가르친 게 아쉽긴 했지만 그때는 거의 그랬다. 이웃 마을 면서기하고 혼인 말이 오갔고 바로 혼인이 맺어졌더란다. 해방 서너 달 전이었을 것이다. 마당에 진달래가 훤하게 피었다 지고 들판이 파랗게 차고 올라오던 때였으니까. 누님은 거기서 두 살 터울로 딸 둘을 낳았다. 그렇게 단란하게 잘 사는 중에 6.25가 터졌지. 온 나라가 쑥대밭이 되고 면서기 일을 보던 매형이란 사람이 놈들 손에 끌려갔다. 그것도 그 집 하인이었던 놈들이 완장 차고 나서서 끌고 갔다더라.


그렇게 며칠 지났을까, 동네는 날마다 더 흉흉하게 변했다. 바닷가에 바닷물에 팅팅 불은 가마니 하나가 떠내려 와 있다고 웅성웅성했다. 그 가마니 안에 놈들에게 끌려간 매형이 숨이 끊긴 채 오랏줄에 묶여 있었다."





"그 집안 어른들이 차례로 끌려갔고 다 목숨을 잃었다. 마지막으로 누님하고 애기 둘만 남았지. 우리 집안하고는 척을 졌다기보다 받은 것이 많은 놈들이어서 그랬을 것이다. 놈들은 누님을 끌고 가지는 못하고 협박했다. 누님은 헤치지 않을 테니 애기들을 내놓으라고 말이다. 누님이 말을 듣지 않자 나중엔 우리 집안까지 몰살시키겠다고 여러 놈이 외할아버지 앞에 몰려와 난리를 쳤다. 하지만 어떤 어미가 죽을 것을 뻔히 알면서 적들의 손에 자식을 넘길 수 있겠니. 그대로 기다리다가는 애기들은 물론 누님도 잃고 우리 집안까지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다. 결국은 친정이라도 살려야 하지 않겠느냐고 집안 어른들이 나서서 누님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우리 누님 인생은 우리 집안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너희 외갓집은 너희 엄마 그러니까 우리 누님에게 모두 결코 갚을 수 없는 빚을 졌다. 누님과 함께 둘째 외삼촌과 내가 애기 하나씩을 안고 가 놈들 손에 넘겼다. 네 살과 두 살. 누님이 놈들에게 무릎 꿇고 사정사정하다 자진하듯 쓰러진 건 말해 뭣 하겠니. 의식을 잃은 누님을 둘째 외삼촌이 둘러업었다. 산등성이를 넘어오는데 '악'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다시 한 번. 둘째 외삼촌 등에 업혀 있던 누님이 순간 눈을 떴다가 완전히 늘어지고 말더구나. 그때 누님은 한 사흘 죽었다 깨어났을 것이다. 깨어나서는 완전히 정신이 나가서 밤이고 낮이고 동네방네를 돌아다녔다. 너럭바위에서 바다로 뛰어내린 것도 몇 번인지 모른다. 둘째 외삼촌이랑 나는 번갈아서 누님 뒤를 쫓아다녔다. 놈들은 더 이상 우리 집에 찾아오지 않았지만 풍전등화 같은 시기였다."


"시간이 가면서 꼬챙이처럼 말랐던 누님은 외할머니를 따라 잠깐씩 집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누님은 외할머니와 목포 큰 점빵에 가서 가시나들 옷을 떼다 이리저리 다니며 팔았다. 그래도 살고 싶지 않은 순간들이 찾아왔겠지. 그때마다 목숨 끊을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알음알음 알게 된 데가 너희 친가다. 배를 타고 또 갈아타고 가야 하는 작은 섬 소식이 우리 집에까지 흘러들었던 거야. 딸이 저러다 세상을 버릴 것 같아 노심초사하던 외할아버지가 이번에는 집안까지 알아본다고 알아봤지. 가난하지만 뼈대 있는 양반 가문이라는 말에는 어쩌다 섬에까지 흘러들어 사는 그 속사정이야 어느 집엔들 없겠냐고까지 하셨다. 그러나 속이려 드는 매파를 무슨 수로 당하겠냐. 너희 아버지는 결혼에 한 번 실패한 사람이라고 들었지만 한 번이 아니었다. 한 번이나 두 번이나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번과 두 번은 두 배라는 엄청난 차이가 있지 않냐. 매형은 두 번 결혼에 실패한 분이었다. 두 번 다 색시가 도망가 버린 거였다. 하지만 누님은 누님이 살던 동네를 잊어야 했다. 그리고 네가 태어났더란다. 니가 우리 누님을 살린 자식이다."





"니가 내 원수다. 너만 없었더라면. 이 징한 시상을 내가 믓한다고 살었겄냐.“

초등학교 5학년 여름 방학, 목포 막내 외삼촌댁에 다녀오던 밤이었다. 마지막 버스에서 내려 얼마를 걸었을까. 한 마디도 없이 타박타박 걷기만 하던 그녀가 도깨비 고개에 이르자 걸음을 멈춰 서며 했던 말이다. 그녀 등에는 막내 여동생이 소창 기저귀에 의지해 잠들어 있었다. 그녀 머리 위에는 외할머니가 목포에 사는 막내 외삼촌 네로 미리 부쳐 놓았던 서숙이며 늘보리 등 잡곡이 든 자루가 귀밑까지 늘어진 채였다.


그녀의 그 말을 들었던 그 밤 그녀에게 들키지 않으려 나는 목구멍이 막힐 듯 숨죽여 울었다. 땀이 흥건한 손으로 그녀의 검은 치맛자락을 행여 놓칠세라 두려움에 떨며 더 힘주어 움켜잡았다. 내가 그녀의 치맛자락을 잡고 있다는 사실조차 죄처럼 느껴졌다. 멀리 허옇게 배를 드러낸 밤바다가 보였다. 거기 검은 그림자처럼 서 있는 마을까지 가려면 걸음을 서둘러야 했다. 그러나 발은 바닥에 붙으려는 듯 잘 떼어지지 않았다. 도깨비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그녀에게 원수인 나는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걸까 근심이 더 앞섰다. 그녀에게 결코 짐이 되지 않는 딸이 되어야 했다.


그녀와 같은 경우를 동물의 세계에선 희생양이라고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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