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2학년 5월 즈음이었다. 하굣길에 같은 반 황**이 내게 서글픈 듯 눈을 파르르 흘기며 말했다.
“넌 공부 잘해서 좋겠다. 우린 다 집에 다녀왔는데 너만 안 다녀왔잖아.”
황**의 말을 듣기 한참 전부터 나는 많이 불편했다. 2교시가 끝났을 때 선생님께서 50명도 넘는 우리 반 아이들 중 열예닐곱 명의 이름을 부르셨다.
“지금 이름 부른 학생들은 집에 다녀오세요. 기성회비 언제까지 낼 수 있는지 어머니 아버지께 알아오기 바랍니다. 그리고 장미, 장미는 선생님한테 와 봐요.”
나는 집에 다녀오지 않았다. 대신 선생님 심부름을 하였다. 황**는 그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름 불린 아이들이 집에 다녀오는 3교시 동안 나는 불편한 마음을 숨기고 집에 다녀오지 않아도 되는 친구들과 함께 아무렇지 않은 척 공부를 했다.
기성회비를 내지 않고 자식을 학교에 보내는 일이 어느 부모에게나 마음 편한 일은 아니었다. 황**은 자신의 부모가 느낄 그 부담감을 간파하고 있었다. 한 번도 내가 영악하다 생각해 본 적은 없었지만 이때를 돌아보면 나는 어려서부터 완전히 영악하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다. 공부를 좀 한다는 데서 받는 특혜를 대체로 거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부하겠다 마음만 먹으면 거부할 수도 있었고 아홉 살 인생이라도 그 부당함을 모르지 않았으면서 말이다.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등교해서 신발장에 신발을 넣어 두었는데 집에 오려고 보니 신발이 없었다. 남아 있는 신발을 신고 집까지 어떻게 갔는지 생각도 나지 않지만 할머니로부터 꽤나 걱정을 들어야 했던 일만은 귀에 쟁쟁하다.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세상을 뜨신 후 상경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였다. 서울 물정에 어두웠을 할머니는 손녀의 신발 분실 소식에 분노하여 그 길로 나를 앞세우고 학교까지 한달음에 달려갔다. 신발은 아무 데도 없었다.
겨우 돈 마련을 하여 새 신을 신고 간 다음날에도 그 다음 날에도 내 신발은 새것인 상태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쉬는 시간이면 신발장에서 내 신발을 확인도 했다. 분명 제자리에 잘 있는 것을 보고 안심했다. 그러나 집에 올 무렵이 되면 내 신발만은 오리무중이었다. 때로는 한 짝이 때로는 두 짝 모두가 행방이 묘연했다. 어제 신발을 샀는데 오늘 또 새 신발을 마련해야 했다.
어느 날 잃어버린 신발을 찾다가 학교 옆 도랑에서 한 짝을 발견했을 때, 그 비참함이란 나 자신이 도랑에 처박힌 느낌이었다. 그 외 신발들은 어디에 어떻게 버려졌는지 아직까지 소식을 모른다. 나중에 서정주 님의 시 ‘신발’이란 시를 읽으며 그래도 시인은 한 번의 경험이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을 정도다. 몇 짝인지도 모르는 내 잃어버린 신발들 역시 시인의 신발처럼 어디를 어떻게 돌아다니다 어디에 어떤 식으로 정박했는지, 아니면 아직 끝나지 않은 방랑을 계속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오래 지속되던 신발 분실 건은 여름방학 시작과 함께 끝이 났다. 문득문득 짝이 있는 것들이 짝을 잃었을 경우를 생각했다.
전과라는 참고서를 몰랐던 나는 그 무렵 반대말 찾기 숙제를 마구잡이로 해 갔던 적이 있다. 가다와 오다 역시 반대의 짝이다. 둘 중 하나의 짝을 잃는다면? 가는 건 계속 가고 오는 건 언제까지나 오기만 한다? 그것이 반대되는 짝인가? 어떤 단어 앞에 ‘안’을 붙이자 정말 많은 반대말을 만들 수 있었다. 다음날 선생님께서는 ‘안’을 붙여서 반대의 뜻이 되는 건 틀리지는 않지만 반대말이란 ‘안’ 자를 붙이지 않고도 반대의 뜻을 나타내는 한 말로 된 단어라고 알려주셨다. 전쟁과 평화, 반대와 찬성, 남자와 여자, 행복과 불행처럼 말이다. 왼쪽과 오른쪽은 반대다. 하지만 왼쪽 신발과 오른쪽 신발은 반대일까? 뱡향은 서로 대칭이지만 같은 신발이다.
그 시기 우리 가족은 한강이 바로 내다보이는 한강변 자갈판 마을을 벗어나지 못했다.
엄마와 아버지가 일터로 나가자마자 나는 잠실벌과 자갈판을 잇는 작은 나루터로 향하곤 했다. 어딘가 아픈 사람 입술 같은 분홍 메꽃을 쓰다듬어주기도 하고 달착지근한 삐비를 뽑아먹기도 하고 혓바닥은 물론 입술까지 새까매지도록 깜부기를 뽑아먹기도 하며 여름날 나의 유일한 아지트일 수밖에 없는 강가에 이르곤 했다. 아버지는 일하러 나가시면서 강에 나가기만 하면 다리몽둥이 부러질 줄 알라고 큰 눈을 부릅뜨며 으름장을 놓았지만 아버지 눈을 피해 노는 데 이력이 날 대로 난 여덟아홉 살 시절, 강은 내 여름의 전부였다. 아침저녁 한 번씩뿐인 배의 왕래 또한 아버지의 눈을 피하기 좋은 방편이 되었다.
때때로 무리를 이룬 군인들이 우르르 몰려와 강물에 뛰어들었다. 강가에 앉은 우리는 군인들이 수영 훈련하는 작은 나루터 반대편에 모여 앉아 놀이에 열중했다. 하루에 지었다 허무는 두꺼비집은 몇 채쯤 되었을까. 우리의 여린 등은 한 해 여름 몇 번씩이나 허물을 벗었다.
군인들이 수영 훈련을 하러 온 날 우리의 눈과 귀는 놀이에 열중하려 하면 할수록 온통 군인들에게 쏠렸다. 군인들이 물속으로 뛰어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영락없이 호루라기 소리가 들리곤 했다. 우리는 조용히 두꺼비집을 짓고 허물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고개 한 번 돌리지 않아도 다 알아차릴 수 있었다. 언제부턴가 삶과 삶 아닌 것을 분별하는 일이 너무나 자연스러워졌다. 만약 누군가 그 차이에 대해 알려주려 한다면 경험으로 다 안다고 답변할 수 있을 정도로 죽음과 죽음 아닌 것의 경계를 자주 목격했다.
우리는 비스듬한 푸른 풀밭에 퇴색한 마른 풀색의 군용 모포가 깔려 있다는 것을 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그 군용 모포 아래에는 수영 훈련을 하던 군인이 누워 있을 거라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수영하다 쥐가 났대. 잭나이프를 갖고 있지 않았나 봐. 쥐가 나면 빨리 잭나이프로 아무 데나 찔러 피를 내야 한다는데, 허벅지를 찌르는 게 가장 쉽대. 많이 다치지도 않고. 우리는 쥐에 대해 꼬리가 길고 두 눈을 반짝거리며 우리 먹을 것을 호시탐탐 노릴 뿐만 아니라 병균까지 옮기는 짙은 회색 짧은 털을 가진 작은 동물이라는 것 외엔 다른 지식은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어쨌든 쥐가 났을 땐 재빨리 피를 내야 한다는 정보 정도는 공유하게 되었다.
그런 저녁이면 아버지는 내게 강에 나가 놀았는지 더 엄하게 점검하셨다. 아버지 정도라면 분명 내가 나가 놀았음을 알 것도 같은데 나가 놀지 않았다고 발뺌하는 내 말에 아버지는 내심 안심하시는 모습이었다. 나는 몇 번 더 영악한 거짓말을 하다 그만두었다.
“오늘도 군인들이 한강에서 훈련받다가 큰일이 났단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엄마가 다시 알려주었다. 초등학교 1~2 학년 시절 여름방학을 생각하면 나는 어른이 된 지금도 내 힘으로는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경계선이라는 칼날 위에 서 있는 듯한 아득함에 젖어들곤 한다. 어디서 왔는지 모를 철은 그렇게 내 마음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