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살이의 사리 빚기
남편의 말 한마디로 인한 삐짐이 생각 외로 오래갔다. 남편도 나도 말 한마디의 중요성을 어제오늘 깨달은 건 물론 아닐 것이다. 그런 점에서 며칠 전을 돌아보면 나 또한 남편에게 잘한 것도 없다. 하루 이틀 함께 산 사이도 아닌데 상대가 내 말에 답변이 없으면 생각할 것이 있나 보다 하고 넘어갔더라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아니 남편의 마음속에서 그 생각이란 것이 농익어 절로 터져 나올 때까지 기다렸더라면 더더욱 바람직하게 흘러갔을 터다.
생각을 정리할 때는 그렇다. 정리가 순간적으로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때로는 정리가 될 듯 말 듯한 그런 순간이 있게 마련이다. 그걸 기다려 주지 못했다. 그렇다고 채근하듯 연속적으로 물어대는 상대에게 갑자기 정색을 하고 관심 갖지 말라는 식으로 되돌아온 물음을 수용한다는 것도 문제가 있다. 어느 쪽이든 다 잘했다고 백 점을 주자고 마음을 굳혔다.
주름살 자글거리는 남편에게서 일곱 살 남자아이의 개구진 모습을 보는 내 눈에는 추운 겨울 세찬 바람에도 콩깍지가 완전히 달아나지 않고 덜렁거리며 붙어 있는 것이다. 어쩌랴.
호강 : 명사. 호화롭고 편안한 삶을 누림. 또는 그런 생활
"호강이 뭔데?"
기분이 풀리고는 있었지만 여전히 냉랭한 투로 남편에게 물었다. 막 잠이 들려던 참이었는지 돌아누우며 대답했다.
"응? 호강?"
자신이 아내에게 무슨 말을 해서 말을 아내가 삐졌는지 잊어버린 게 분명하다.
친구를 만나고 돌아온 남편에게 갑자기 상황이 기운 데다 상처까지 한 남편의 그 친구가 걱정되어 아내는 몇 가지를 물었다. 남편은 내내 묵묵부답이다가 왜 남편의 친구에 대해 꼬치꼬치 묻느냐고 날 선 반응을 보였다. 아내는 그렇다면 부부 사이에 딱 필요한 말만 하며 살겠노라 결심한다. 그러자 20분도 안 돼 남편은 조금 전의 날 선 반응이 불러올 파장을 의식한 듯 생각을 정리하는 중이라 제대로 된 반응을 못 보였다며 '호강을 못 시켜줘 미안' 등을 운운했던 것이다.
이틀 동안은 식사해라, 잘 먹었다 식의 식사 관련 말이나 묵언수행처럼 서로에게 필요한 일을 돕는 정도로 적막이 흘렀다. 그리고 남편은 자꾸 아내 곁을 맴돌았다. 남편의 그런 행동은 아내에게 불편감을 주려는 의도보다는 자신의 불편을 아내가 알아주었으면 하는 면이 훨씬 큰 법이다.
사전에서는 호강의 의미를 '호화롭고 편안한 삶을 누림. 또는 그런 생활'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안 봐도 뻔할 남편 눈을 상상하며 물었다.
"마누라 호강시켜 주고 싶어?"
"그럼."
"그게 꿈이야?"
"꿈 중에 하나이기도 하지"
"그럼 내일 복권 하나 사 봐요."
"복권?"
"그래 복권. 복권 1등이라도 당첨돼야 당신이 생각하는 호강이란 걸 마누라에게 누리게 할 수 있을 거 아냐."
"복권 몇 번 사 봤는데 그 많은 숫자 중에 한 줄에 서너 개 맞는 것도 아니고 여기저기 흩어져서 서너 개 정도 맞던데 뭘."
그래서 또 이불속에 누워서 말이 길어졌다. 복권을 사도 꼴찌 한 번 당첨해 본 적 없는 남자가 무슨 아내를 호강시켜 줄 꿈을 꾸느냐서부터 시작해서 복권이 1등 당첨되면 당신은 뭐 할 거냐, 당신은 조금 더 고급술을 마시며 좋아할지 모르지만 주색잡기 어느 것 하나 즐길 줄 모르는 나는 여전히 이 타령으로 베란다나 들락거리며 쪼그만 화초들 들여다보느라 여념이 없을 거다, 뭐 조금 따뜻한 남쪽에 작은 땅뙈기 구입해서 사시사철 흙냄새 맡으며 살 수도 있겠지 등등 남편이 말할 기회도 주지 않고 내 말만 주욱 늘어놓은 다음 다시 물었다.
"이제 생각이 좀 정리가 됐습니까?"
남편이 일어나 앉았다. 나도 덩달아 일어나 앉았다. 남편이 말했다.
"미안합니다. 당신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닌데 누구는 실패에서도 몇 년 만에 보란 듯이 일어섰는데 지금껏 나는 뭘 하고 살았나 싶은 자괴감에 들어서......"
그럴 수 있다. 그렇지만 나는 누구? 당신 살 속의 살이요 뼈 중의 뼈라고 또 힘주어 말하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오늘 아침으로는 사과 한쪽과 호빵 한 개에 커피 한 잔을 냈다. 커피를 타면서 녹두알 정도 울금가루를 섞고 우유를 넣었다. 오늘 아침 우리 부부는 울금이 커피와 어울리는지를 실험해 보는 마루타다.
"커피 맛 어때?"
"음, 약간 쓴맛이 나는데."
"울금가루 넣었거든. 싫은 맛은 아니고?"
"난 쓴 거 좋아하잖아."
커피에 섞은 울금가루는 알갱이가 되어 가라앉았다. 컵 아래쪽으로 갈수록 울금 알갱이가 혀와 목구멍에 느껴진다. 익숙해진다면 모를까 내 취향이 아니다.
"울금이 몸에 좋다니까 커피 탈 때 울금가루 아주 조금씩 넣어서 탈까?
"그래도 괜찮지."
뜨거운 호빵을 남편은 가운데를 눌러 반으로 갈라 먹고 나는 부푼 채로 가운데를 갈라 활짝 핀 꽃 모양으로 만들어 잘라먹는다. 며칠 구름색 짙었던 분위기 속으로 아침 햇살이 파고들었다.
"내가 말하니까 좋지?"
"말해 뭐해."
"호강시켜 줘서 고마워."
"?"
"말할 상대가 있어서 호강이라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