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기가 나갈 듯 나갈 듯하면서 완전히는 나가지 않고 한 발 걸치고 있는 듯한 날이 일주일이 넘었다.
좋은 사람도 이틀 밤 자고 나면 알아서 떠나 줘야 또 보고 싶은 법인데 억지로 끌어낼 수도 없으니 살살 달래는 중이다. 일단 떠나면 다시는 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이 감기이기도 하다. 떠나는 뒤에 대고 다시는 오지 말라고 기도한 적 없기에 찾은 적 없음에도 가끔 찾아드는지도 모른다.
하루 세 번 따뜻한 소금물로 코와 목을 헹구고 보온병엔 뜨거운 대추생강차가 상시 대기 중이다. 그나마 가슴 답답하게 하던 숨쉬기가 편해지니 살 것 같기는 하다. 증상은 가볍고 전염성 강하다는 오미크론이 찾아든 건 아닌가 걱정이 들기도 했었다. 특별히 아픈 데도 없고 열도 나지 않으니 걱정 반 안심 반이었던 며칠이 흘렀다.
목구멍을 데워줄 따끈한 국물이 먹고 싶었다. 미역국이 있긴 하지만 내 손대지 않고 목구멍으로 따끈한 국물만 넘기고 싶은 것이다. 창에서 가까이 있는 사람이 창에서 멀리 떨어진 사람에게 열린 창문을 닫도록 하기 위해서는 창에서 가까이 있는 사람이 선수를 쳐야 한다. 열두 시가 되려면 한 시간도 더 남았는데 남편에게 선수를 쳤다.
"오늘 점심은 라면 어때요?"
남편이 깜짝 놀라 반색을 한다.
"아니, 당신이 라면을?"
"감기가 빨리 안 나가네. 외출하다가 돌아서서 핸드폰 찾고 다시 어디만큼 가다 전화 걸어 책상 어디쯤 놓아둔 서류봉투 갖고 나오라는 당신처럼 말야."
"아니, 감기 안 가나는 걸 왜 또 나랑 비유하고 그러십니까?"
"몰라, 감기도 당신 닮아 내가 그렇게 좋은가 싶은 거지 뭐."
"대답 잘못하면 큰일 나겠죠. 넵, 그런가 봅니다."
"그럼 오늘 라면은 당신이 끓이는 겁니다."
"넵."
남편이 라면 끓이게 하기 성공이다.
라면 한 개 반에 어묵 채 조금 넣으면 가끔 먹는 점심 라면으로 둘이 먹기에 딱 좋을 양이다. 매운 음식을 즐기는 남편은 매운 라면을 끓여도 고춧가루를 뿌려 먹곤 한다. 반면 나는 라면을 즐기지도 않지만 배가 쫄쫄 거리거나 아주 바쁜 때 아니면 그것도 누군가 끓여준 라면을 찔끔 먹는 편이다. 그나마 매운맛은 질색이다.
매운맛 라면과 순한맛 라면을 하나씩 남편에게 건넸다.
"자, 여기 라면 두 개. 순한 거 한 개에 매운 거 반 개 넣어 끓이면 되겠죠?"
"왜 같은 걸로 안 주고?"
"너무 매우면 내가 먹기 힘들잖아."
남편이 빙그레 웃었다. 뭐지? 소리 없는 저 빙그리한 웃음의 의미는?
"왜?"
"아냐."
"왜 픽 방귀처럼 웃느냐니까? 기분 나쁘게."
"이 사람은 웃어도 시비야."
1초쯤 지났을까, 남편이 웃음을 터뜨리며 물었다.
"아니, 라면 맛은 뭐가 결정하는지 진정 아직 모른다는 거야?"
"?"
"확 그냥 매운맛 스프로 버무릴까 보다."
맞다, 라면 맛은 스프가 결정한다. 이 기본적인 진리를 어쩌면 나는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을까. 창가에 가까이 앉아 창에서 멀리 있는 남편에게 창문 닫으라는 주문을 할 생각만 했다. 남편이 좋아하는 매운맛 라면 하나 끓여주는 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그것도 따끈한 국물을 마시고 싶은 내가 끓여야 하는 건 더욱 당연한 이치인데도 말이다.
어처구니없게도 단연코 한 번도 스프가 라면 맛을 결정한다는 자체를 알지 못했다는 게 신기할 정도다. 라면 자체가 고유의 매운맛이나 순한 맛을 갖고 있다고 믿었던 것도 아니니 더더욱 신기하다. 나는 겉면에 쓰여 있는 '매운맛'과 '순한맛'이라는 글자로 맛을 결정했던 것이다.
남편이 라면을 끓여 대령했다.
"순한맛 스프 하나 넣었습니다. 국물도 당신한테 더 많이 드립니다. 나는 고춧가루 넣어서 먹으면 되니까."
"나 머리 너어무 좋은 거 아냐?"
"그럼."
"그럼은 또 뭐야?"
"경험을 통해 터득한 대로 했습니다. 아니라고 하면 무슨 일이 생길지 알고 있습니다."
라면발이 입에서 튀어나오도록 남편이 웃어젖혔다.
"어쩌면 나, 라면을 입에 대지도 않을 때부터 지금까지 라면을 끓여 내면서도 라면 맛을 결정하는 게 뭔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을까?"
"머리가 너어어어무 좋아서."
식기 전에 라면 국물이나 마시자. 목구멍이 데이지 않을 정도로 따끈따끈하다. 목구멍이 확 풀리는 듯하다. 라면 맛을 결정하는 건 스프가 아니다. 뭐니 뭐니 해도 라면 맛을 결정하는 건 내 입맛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