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ter 9
요즘 난 카페에서 거의 살아. 일주일에 두세 번 정도는 학교 마치고 카페 가서 과제하느라 밤을 새거든. 우리 과는 필기시험이 없고 과제로 모든 점수를 매겨서 과제에 목숨 걸어야 돼.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난 카페는 커피만 마시는 곳인 줄 알았어. 근데 나와 같이 복학한 동생이 카페 가서 공부하자길래 한 번 따라가 봤는데 그런 신세계는 처음 봤어. 아예 카운터에서 담요도 빌려주더라고. 자리마다 콘센트가 없는 곳이 없고. 그 프랜차이즈 카페는 아예 컨셉을 카공족을 위한 공간으로 잡은 것 같더라.
원래 난 공부와는 담쌓고 살았었어. 하지만 군대 가서 우연히 책 읽기 시작한 뒤로는 뭔가 생각이 많아지고 나도 모르게 공부에 마음이 가더라. 단지 변한 건 그뿐인데도 복학하고 나니까 교수님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아먹겠더라고. 강의 시간되면 강의실로 능기적 들어와서는 고작 10분 떠들고 과제 하나 던져주고 나가는 교수님들이 20살 땐 아니꼬와 보였는데 지금은 괜찮아. 오히려 그게 더 낫다고 여길 정도야. 뒤늦게 공부를 시작해 보니까 공부는 원래 혼자 하는 거더라. 물론 모르는 게 있을 때 물어볼 사람이 있으면 좋기야 한데, 우리 실내디자인과 과제 같은 경우엔 내 생각을 고스란히 녹여내기만 하면 되는 거라 딱히 물어볼 것도 없어. 오히려 물어본다면 나한테 물어봐야지. 창작은 내 생각이 중요하니까. 그리고 세상이 좋아져서 웬만한 건 다 독학으로 배울 수 있기도 하고. 그 외적으로는 같이 공부하는 애들이랑 술 마시거나, 주말엔 고등학교 친구들이랑 놀아. 남는 시간엔 대부분 책 읽고.
난 책 때문에 얻은 게 진짜 많아. 공부도 공부지만 딱 꼬집어서 말을 못한다 뿐이지 그 외적으로도 많이 변했거든. 사람을 상대할 때 대화법이라든가 상황을 받아들이는 생각법이라든가 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 너랑 처음 만났을 때 쉼 없이 떠들 수 있었던 것도 책을 읽은 덕분이라고 생각해. 만약 책을 읽지 않은 상태에서 널 만났다면 어버버 횡설수설하다가 말아먹었을지도 몰라. 그럼 첫 만남 이후에 너한테 보낸 카톡이 가차 없이 읽씹 당했을지도 모르고. 그랬다면 당연히 이런 편지를 쓰고 있지도 않았겠지.
한 손엔 언제나 책 한 권이 들려 있어. 학교 갈 때 지하철에서도 읽고, 강의실에서도 조금씩 읽고, 공강 때 벤치에 앉아서 읽기도 하고. 아예 읽지 못하는 날도 있는데 그래도 가방에 꼭 넣고는 다녀. 웬만하면 책은 앞으로도 평생 읽을 것 같아. 책만큼 좋은 게 없더라. 읽는데 돈도 별로 안 들고 읽을거리는 넘쳐나고. 확실히 독서하면서부터 심심하단 말을 거의 한 적이 없는 거 같아. 아마 한 번도 하지 않았을 수도 있겠고.
내 얘기를 하자니 아무래도 책 말고는 딱히 할 게 없네. 다른 건 별로 관심 없어. 책 읽기 전엔 게임 많이 했었는데 읽을 책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보니 자연스레 게임은 줄었어. 과제하다가 머리 식힐 때 가끔 하는 정도. 운동도 하긴 하는데 양심상 깨작거리는 정도로만 해. 우리 아버지는 아직도 배에 왕자가 있을 정도로 열심히 하시던데 난 헬스장 가는 것도 힘들더라.
이런 날 따분하고 지루한 사람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어쩔 수 없지 뭐. 그게 나인데 어쩌겠어. 연애상대가 될지도 모르는 사람과 만났으면 내가 해야 할 일은 그냥 나를 보여주는 것뿐이라고 생각해. 과하게 꾸며봤자(꾸밀 줄도 모르지만) 나중에 들통날 게 뻔하고, 또 길게 보면 그것만큼 여러모로 손해 보는 장사가 없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