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감사합니다 여기까지 오게 해 주셔서

by 최서연


‘감사합니다. 아주아주 힘들었지만 여기까지 오게 해 주셔서.’ 산책을 하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오랜만에 느끼는 두근거림과 기분 좋은 설렘이 6 월의 푸른 나뭇잎들과 함께 싱그럽게 빛났다. 나는 결국 관계 속으로 다시 들어가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다가 또 더 나쁘게 끝날 수도 있겠지. 그리고 또 바닥을 칠 수도 있겠지. 그래도 그 순간에 기분 좋은 설렘은 한껏 즐기기로 했다. 신기하게도 다시 그런 기분을 느낄 수가 있긴 있구나 싶어서.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면서 나무들 사이로 한참을 걸어 다녔다. 하지만 아무리 덤덤해지려고 해도 좋아하는 것이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것만큼 짜증 나고 기분 나빠지는 일이 없다. 이제는 어떤 것에도 그렇게 크게 미련 가지지 않고, 연연하지 않고, 욕심내지 않을 것 같았던 나도, 한없이 쪼잔해지고, 신경 쓰이고, 예민해지고, 이유도 모를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또 조절이 안 되는 이 감정을 어떻게 해야 할지 두려워하면서 친구에게 조언을 구하기도 하고, 책을 읽기도 했다.


‘그래. 좋은 영향을 받고, 단점을 이해하는 건 그다음이다.’


‘다 가볍게 생각하자. 부풀어 오르면 한도 끝도 없을 것 같지만 생각해보면 별것도 아니야. 나의 소중함을 뛰어넘을 건 없어. 사랑을 미화하지 마.’


‘내가 먼저 다가가고 좋아하는 티 낼 때는 거만하게 굴더니, 관심 끊으니까 다가오는 바보 같은 사람들한테 미련 가지지 말자.’


‘난 왜 이렇게 얄팍한 술수에 잘 넘어가는 걸까. 사람을 깊이 보지도 못하고. 하아...’


나는 또 사정없이 흔들릴 것만 같아서 두려웠다. 떠오르는 감정들을 모두 적으면서 그 감정에 대해 반박하고, 조절하려고 애썼다. 나는 원래 좋아하는 게 생기면 망설이지 않고 다가가고, 자존심 그런 것 보다도 좋아하는 감정 앞에서는 그저 솔직하게 표현하는 게 더 중요했다. 그렇게 해도 나는 항상 사랑이 남았다. 나도 한 번쯤은 내 사랑도 다 써서 이제 없다고 하고, 돌아설 수 있었으면 했는데, 상대방은 돌아섰는데도 내 사랑은 남아있었다. 그래서 나는 상대방이 돌아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그 감정이 아예 소진돼서 없어질 때까지 멈추지 않고 달려들었다. 애초부터 그 마음은, 누른다고 눌릴 것이 아닐 수도 있었겠다. 누른다고 눌린 줄 알고, ‘역시 나는 많이 변했어. 이제 그렇게 멍청한 짓은 하지 않아.’라고 내심 자랑스러워하고 안심하면서도 계속 얘기하고 싶고, 궁금하고, 네가 하는 말에 ‘그럴 수도 있지.’라는 말 밖에 못하는 내가 싫었다. 뭔가 확실하게 말해주고 손톱만큼의 도움이라도, 위안이라도 되어주고 싶은데. ‘이것도 이럴 수 있지, 저것도 저럴 수 있지.’라는 말이 왜 이렇게 무책임하고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을까. 내 입 밖으로 뱉어 나와지는 말들이 너무 가볍게 느껴져서 그 가벼움에 네가 할퀴어 지기라도 할까 봐 걱정이 되면서도, 다른 할 말을 찾지 못해 결국 그런 말만 늘어놓는 내가 엄청 별로였다.


나는 거리를 조절하면서 다가가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게 마음대로 될 리가 없었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어떡하지.’ 하루에도 ‘어떡하지.’라는 생각을 100번도 넘게 한 것 같다. 또 후회하게 될까. 잘 피해 가면 다행일까. 진짜 어떡하지. 얘기하면 얘기할수록 더 얘기하고 싶고, 걱정되고, 신경 쓰이고, 만나고 싶은데. 어떡하지. 아닌 거 알면서 다가가면 또 후회하게 될까. 또 다치게 될까.


내가 좋아하는 따뜻한 것이 언제 낯빛을 바꾸고 차가운 것이 되어서 내 마음속까지 얼어붙게 만들어 버릴지.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그 안에 어떤 얼굴을 가지고 있는지, 사실은 내가 보는 그 모습일지, 내가 보고 있는 그 모습이 아닐지, 나는 그런 걸 판단하는 눈이 뛰어나지 못한 편이라 항상 무서운데. 좋아하는 건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좋아하는 게 좋은데. 무서워도 그저 좋아하는 게 좋아서 나를 믿고 맨날 그렇게 좋아해 버리다가 시궁창에 처박히길 몇 번 하고 나니,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좋아해 버리는 걸까 봐 무서웠다. 가시 돋친 얼굴로 언제 그랬냐는 듯 나를 찔러올까 봐 두려웠다. 좋아하는 것을 마음 놓고 좋아하지 못하는 내가 슬프고, 그런 판단력이 부족하니까 나를 믿지 못하는 내가 짜증 나기 시작했다. 나는 계속 어쩔 줄을 모르고 갈팡질팡하다가 어느 순간, 어쩔 수가 없었다.


‘아 어떡하지 좋은데. 어쩔 수 없을 것 같다. 진짜 설레는 걸 어떡해. 다른 아무리 괜찮고 더 멋진 사람이 있다고 해도 네가 나를 보고 웃는 게 너무 설레는 걸. 다른 사람이 아니라 네 미소에만 설레는 걸 어떡해. 나를 보면서 싱긋 웃어 보이는 네 표정이 어렴풋이 보인 순간에 오랜만에 정말 심장이 콩닥콩닥했어. 고개를 푹 숙이고 나한테 기댔을 때는 너무 따뜻했고, 생각만 해도 손끝이 저릿저릿한 기분이야.’


설렘에는 판단이 필요 없다. 이유도 없다. 그냥 결정되는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낼 수도 없이 그냥 그런 것이다. 그 설렘은 내가 판단하지 않아도 정확히 알 수 있었고, 그래서 나는 내가 너를 좋아하는 것은 겨 우 인정했지만 내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무슨 책에서나 나오듯이 한 번도 상처 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기에는 내가 너무 많이 바닥을 친 것 같고, 그래서 이제는 내가 다치긴 싫고, 근데 그냥 놔두기에는 예전에 나를 보는 것 같아서 더 싫고. 그냥 그때에 어두움에서 나오지 못하고 허우적거리던 나도, 세상에 한 명 정도는 옆에서 바라봐 주면서 기다려줬다면 조금은, 낫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또 잘못될 거 각오하고 만나고 그걸 책임지고 이겨내야 하는 건가. 자유는 거리에서 나오는 것이고, 거리를 서운하게 생각하기보다는 그만큼 내가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너와 내가 독립되어 있는 사람이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함께 있는 것이 즐거울 때, 그것이 건강한 관계라고 되뇌며 다치지 않아 보려고 애쓰는 수 밖에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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