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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직 Oct 22. 2023

도넛 사건

아빠의 극대노

초등학교를 들어가기 전의 일이었던 것 같다.

부산에 살고 있던 우리가 무슨 볼 일이 있었는지 오빠와 나 아버지, 이렇게 셋이 대구를 가게 되었다.

대구에서 일을 마치고 대구역 근처에서 부산으로 오는 기차를 타기 위해 이동 중,

마침 역 근처에 친구가 하는 도넛 가게가 있으니 가서 안부도 전할 겸 들러서 애들 도넛도 사주고 오라는 엄마의 말에, 아버지가 아직 남은 기차시간 동안 허기도 채우고 인사도 하자며 도넛 가게에 들러 가자고 하셨다.


 "아이고, 얘들아 어서 오너라, 그새 많이 컸네!!" 

엄마 친구분은 오빠와 나를 오랜만에 보는 자식 보듯 반갑게 맞아주시며, 큰 흰 쟁반에 수북하게 도넛을 담아 오셨다. 한 3단쯤? 가득 쌓인 도넛이었을까? 엄청난 양이었다. 그런데 잠시 그 도넛을 보고 눈 감았다가 뜨니까 '5분 순삭'으로 도넛이 사라지고 없었다. 


나중에 가게를 나온 뒤 입술을 앙 다물며 끓어오르는 분노에 찬 목소리로 야단을 치셨던 아버지 표현에 의하면, 오빠와 내가 서로 빨리 안 먹으면 뺏길까 봐 평생 굶주린 사자처럼 입안으로 도넛을 구겨 넣다시피 아구아구 먹었다는 것이다. 졸지에 자식을 일주일 아니 한 달 동안 아무것도 못 먹고 굶긴 부모가 됐고, 무엇보다도 엄마 친구 앞에서 보인 자식들의 그 거지 같은 행태가 너무나도 창피해서 몸 둘 바를 모르겠더라고, 

"내가 아주 니들 때문에 창피해서 응?!! 아주 창피해서 내가!!"란 말만 수십 번 반복하셨다. 


아니, 이거 참 억울하다. 

아빠는 매번 주전자에 막걸리며 소주며 그것도 외상으로 사 오라고 심부름시키면서 내가 좋아하는 과자나 아이스크림 한 번 사 준 적 없으면서, 그 어린 나이에 먹고 싶은 것이 얼마나 많았을 식욕왕성한 자식들이 엄마 친구가 주신 것을 그렇게 잘 먹은 걸 그렇게 길거리에서 핀잔을 주고 입술을 앙 다물면서 노려보면서 얘기하셨어야 했을까?


도넛이라는 평소 잘 먹어보지도 못한 맛있는 음식이 눈앞에 수북이 쌓여있고, 바로 앞에는 잠시라도 한 눈을 팔면 먹을 걸 다 뺏기게 생긴 인생의 경쟁자 오빠가 떡하니 앉아 있는데, 어린 내가 무슨 체면을 차리고 예의를 차린다고 먹을 것 앞에서 다소곳이 앉아 있는 말인가. 우리 아빠가 엄마 친구한테 너무나 미안하고 부끄러워 아무리 아무리 돈을 드리려고 해도 

"저렇게 잘 먹는 걸 보니 마 됐습니다 돈 안 주셔도 되예ㅎㅎㅎ"하셨다.

자식들 때문에 부끄럽고 창피한데 아예 무전취식을 한 셈이 돼 버리니 그날 아빠의 노기에 찬 얼굴과 성질을 꾹꾹 눌러 담아 입술을 꽉 다물며 "내가 창피해서!!"란 극대노한의 억양이 그냥 어리고 소심한 내 뇌리에 콱! 박혀 버리고 말았다.


그 뒤 나는, 친척집을 가건, 부모님의 지인들과의 모임에 가건 눈앞에 어떤 풍족한 음식이 있어도 그 도넛처럼 허겁지겁 먹는 일은 없었다. 내가 배고팠던 것보다 우리 아빠의 심기가 더 중요했고, 뭔가 나의 거지 같은 행동이 우리 아빠의 체면을 구겼다는 것에 대한 보상심리랄까? 못살고 못 먹고 내가 하고 싶은 것도 다 못하고 못 배우고 자란 거는 맞는데, 어렸지만 어쩔 수 없는 생존본능으로 상당한 인내심을 갖고 살아야 했던 거다. 


요즘도 가끔 도넛을 먹을 때마다 그때 그 일이 떠오르곤 한다.

도대체 나와 오빠가 어떻게 먹었길래, 아빠가 그렇게 화난 얼굴로 부르르 떨며 야단을 치신 걸까? 먹고 싶어도, 갖고 싶어도 마음껏 먹거나 가질 수 없었던 자식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었을 것이다..라고 여긴다면 솔직히 아빠를 지나치게 미화한 것일지도 모른다.

'가난'은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이렇게 티가 났던 것이다. 그날, 도넛 가게를 나서면서 본 아빠의 극대노사건은 아마 아빠의 가장으로서의 '자존심'때문이었을 거니까. 오빠와 내가 그 '자존심'에 상처를 준 것이니까.

그랬거나 저랬거나 아빠를 극대노하게 만들고 자존심을 깔아뭉개며 '5분 순삭'으로 먹어치운 도넛은 진짜로, 인생꿀맛 중에 꿀맛이었다는 것은 안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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