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 탐방은 나의 버킷리스트 중의 하나였다. 단군신화의 마니산, 항몽지로서 개경에서 천도하여 39년간 임시수도, 정묘호란 때 왕족의 피난처, 정족산성 초지진등에서 열강들과의 주요 전투 그리고 일제 침략의 발판이 된 강화도조약이 떠올랐다.
남문일대 성곽(복구 완료)
강화 산성은 인천광역시 강화군에 있다. 13세기 몽골의 침입으로 국토가 유린되자 무신정권 집권자 최우는 1232년 수도를 개경에서 강화도로 이전하였다. 성을 흙으로 쌓았고, 내성·중성·외성으로 이루어졌다. 중성은 내성을 지키기 위해 쌓았고, 외성은 1233년 강화도 동쪽으로 흐르는 강인 염하강을 따라 쌓았다. 외성은 몽골군이 해전에 약한 것을 고려해 바다를 건너 공격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방어시설이었다. 39년간 육지로부터 물자를 지원받았다. 원종 11년 개경으로 수도를 다시 환도하게 되면서 몽골과 고려의 강화조약의 조건으로 강화도에 지은 성을 모두 헐었다.
남장대 일대 성곽(일부 복구 및 복구 중)
남문~남장대 일대 성곽(미복구)
이후 조선시대 강화산성의 내성이었던 강화성을 다시 축조하였지만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대에 의해 다시 파괴당하였고, 조선 후기 숙종 3년에 성을 다시 보수하면서 모두 돌로 쌓고 넓혀 지었다. 강화도는 우리의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고려 고종황제 강도 행차(1)
고려 고종황제 강도 행차(2)
출발일(2024.04.06., 토, 17도) 날씨는 맑고 벚꽃이 만개하였다. 제일 먼저 강화산성이 궁금했다. 성은 하루아침에 쌓을 수 없는, 국가의 모든 에너지를 장기간 쏟아부어야 완성할 수 있는 당대의 걸작품이다. 강화산성의 일부는 복구되었지만 많은 부분이 여장 축성 중이거나, 토성 흔적 혹은 아예 지워버린 상처가 곳곳에 보였다. 하루빨리 복구하여 후세에게 유산으로 물려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강화 원도심(고려도성)을 둘러보고 시간이 없어 급히 택시를 타고 부근리에 있는 강화역사박물관과 강화고인돌 박물관을 둘러보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강화산성
아쉽게도 바로 옆에 있는 강화자연사박물관 입장에 실패했다. 나중에 시간이 있으면, 전투지(갑곶돈대-강화전쟁박물관, 광성보, 덕진진, 초지진등)를 탐방하고 고려산, 마니산에 올라가 보았으면 한다. 특히 고인돌 주차장에서 나를 태워주신 버스 기사님이 고려산에 올라가 보았느냐고 물어 당황했다. 기사님의 자부심이 느껴졌다.
서울 염창역에서 하차, 3000번 직행버스를 타고 강화대교를 건너 종점인 강화터미널에서 내렸다(1시간 40분 거리). 탐방경로는 다음과 같다. (굵은 글자 부분이 금회 보고 드리는 구간임, 남문~북문)
강화터미널에서 남문 방향으로 걸어오다 보면, 역사책 속에 나오는 강화도의 훌륭한 위인 10인(김상용, 윤집, 양헌수 등)에 대한 설명판이 나란히 서 있다.
강화산성(남문)
강화산성 남문(안파루, 晏波樓)
왕의 길을 따라가다 보면 강화도행렬도를 볼 수 있다. 1849년 6월 조선 24대 헌종(1827~1849)의 왕위를 계승하게 될 강화도령 변(25대 철종 1831~1863)을 모시러 오는 왕실 행렬을 그린 역사기록화다. 곧, 남문에 도달하게 된다. 강화산성은 고려가 몽골 침입에 대항하기 위하여 강화도로 수도를 옮겼다. 내성 중성 외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내성은 1259년 몽골에 의해 헐린 후, 조선시대 돌로 다시 쌓았다. 그러나 병자호란 때 청의 군대가 다시 파괴하여 1677년(숙종 3)에 다시 넓혀 고쳐 쌓았다. 동서남북 4개 문과 비밀통로 암문 4개, 수문 2개, 관측 지휘소인 남장대 북장대가 있었다.
강화산성 남장대
강화산성 남장대
남산의 정상에 있는 남장대까지 다양한 형태의 파괴된 성곽 모습이 우리의 역사를 말해준다. 일부구간에서는 성곽이라기보다는 산책로에 가까운 토성형태로 남아 있는 곳도 있다. 진달래와 개나리가 곳곳에 피어 있다. 장대는 전쟁 시 관측 및 장군의 지휘소다. 평시에는 성의 관리와 행정기능을 수행했다. 강화산성은 1232년 몽골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최우가 1234년 각 도의 도민과 장정을 징발하여 내성 중성 외성으로 구분 축조하고. 그 안에 궁궐과 백사의 건물을 개성의 그것과 비슷하게 건립하였다. 둘레 7.1km의 강화산성에는 남산과 북산에 각각 남장대 북장대 그리고 서문안에 서장대가 있었다. 2010년에 남장대만 복원하였다.
남산전경 (고려궁지 그리고 강 건너 북한이 보임)
남산전경 (남장대)
남산에서 멀리 보이는 강 건너 북한의 해창포, 개성시(개풍군), 흥교면이 보인다는 설명판이 남장대 바로 앞에 있다. 날씨가 흐려 추측만 할 뿐이다.
강화산성 남암문
강화산성 남암문
암문은 문루를 세우지 않는 비밀 출입통로다. 전시에는 성안에 필요한 물품 등을 운반하고 적에게 포위당했을 때는 극비 구원요청하거나, 적을 역습할 때 통로로 이용했다. 4개의 암문중 남쪽 남암문만 남아 있다.
강화 석수문
강화석수문
서문 바로 남쪽에 홍예가 3개인 수문이 있다.
연무당 옛터
연무당옛터(강화도조약 체결지)
수문 바로 밑에 연무당지가 있다. 1876년(고종 13)에 강화도 조약이 최종 조인된 장소다. 이 조약에 의해 인천, 부산, 원산을 일본에게 개항하게 되어 일제 침탈의 계기가 되었다. 과거사를 잊지 않게 하기 위해 이비를 세웠다.
강화산성 서문(첨화루)
강화산성 서문(첨화루)
설명은 남문을 참고하시면 된다. 1711년(숙종 37년) 세웠다. 1796년(정조 20) 고쳐 세웠으며, 1977년 수리했다.
강화 향교
강화 향교
서문에서 북쪽으로 약 200m부터 북문까지는 성곽이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아쉽다. 민가가 들어서 있고 일부는 밭으로 변했다. 북문 가는 길에 홍살문이 보여 올라가 보니 괘 큰 향교가 있었다. 유교 성현들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또한 지방민 교육을 위해 세웠던 국립교육기관이었다. 1127년(고려 인종 5) 세워지고 여러 차례 옮겨졌다가 복원되었다. 1731년(영조 7)에 이곳에 이전되었다. 제사공간인 대성전과 동무. 서무 교육기관인 명륜당과 여러 부속건물이 있다. 토지 노비 책 등을 국가에서 지원했으며 제사와 교육 기능을 담당했다. 갑오개혁 이후 제사기능만 남았다.
주변에 강화여고와 강화향교유림회관이 있다. 최근 핫이슈인 근친혼에 대한 반대 플래카드가 걸려있다. 유교 기본 정신이 거센 도전에 직면해 있다.
강화산성 북문(진송루)
강화산성 북문(진송루,鎭松樓)
설명은 남문을 참조하시면 좋겠다. 본래 누각이 없었으나, 1783년(정조 7) 누각을 세웠다. 석축만 남았었으나, 1977년 복원하였다. 곳곳에서 강화산성이란 역사를 복원 중이다. 북문과 연결된 도로변에는 벚꽃이 만개하여 가족 연인 그리고 외국인들로 붐볐다.
글이 길어져 강화 원도심 그리고 강화역사박물관 고인돌은 다음 편에 말씀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