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내용은 제가 경험한 일부 세계에 대한 개인적 의견입니다. 혹, 유사 분야에 계신 분들께 불편을 드리는 건 아닐까 걱정하며 조심스레 적었습니다.
오늘날 한국의 공무원, 공공기관, 기업의 근무 정년 나이는 60세, 교사는 62세, 교수는 65세이다.
부문별로 다소 연령에 차이는 있다.
한편, 공무원, 공공기관, 교사, 교수는 모두 정년까지 근무할 수 있는 거에 반해 기업은 그렇기 쉽지 않다. 즉, 전자는 정년이 보장된 직업이고 후자는 그렇지 않다.
20년 기업 근무 동안 다양한 형태로 '구조조정'을 겪었다. 사업부가 통째로 날아가기도 했고, 돌연 부서가 없어지기도 했고, 권고사직 형태로 동료가 회사를 나가기도 했고.
대기업은 장기적으로 사업성이 없거나 전략 방향과 달라 시너지가 약하면 비즈니스를 과감히 접는다. 2000년대 초반 삼oo기는 키보드, 마우스, 스피커, 광픽업, FDD 등 많은 사업을 접었고, 2010년대 삼oo자는 하드디스크 사업을 씨게이트에, 프린터 사업은 HP에 넘겼다.
적자로 경영이 좋지 않을 때는 경비 축소를 위해 인력 구조조정을 단행한다. 사람을 자른다.
인력 구조조정은 모두에게 힘든 시기다. 단체로 살얼음을 걷는 분위기랄까. 누군가는 나가야 하고, 내가 그 대상일 수도.
나이를 기준으로 나갈 사람을 정하기도 하고, 고과를 기준으로 선별하기도 하고, 부서에 인원 할당을 해 부서장이 정하기도 하고. 구조조정할 때마다 다른 기준과 규모에 누굴지, 한동안 살벌한 시기를 보내야 한다.
이직을 준비하던 A는 목돈 받고 나가는 절호의 찬스가 되지만, 이런 환상의 타이밍은 별로 보지 못했다.
끝까지 회사를 다닐 계획을 가진 B와 C에게는 마른하늘의 날벼락, 청천벽력 같은 상황임이 틀림없고.
권고사직 리스트에 올랐지만 나가지 않고 버티는 이는 공개적으로 왕따를 경험하기도 한다. 또는 그 사람을 내보내야 살아남는 몇몇에게 심한 비난의 말을 듣기도 하고.
기업에게 이러한 조정과 변화는 지속된다. 나의 경우, 큰 조정은 7년에 한 번 정도, 작은 변화는 2~3년 단위로 온 거 같다. 경기 전망이 안 좋을 때면 구조조정은 더 크고 더 과감하고.
몇 번의 경기 침체를 맞으며 기업의 구조조정을 직간접적으로 겪은 청년들은 공무원과 공사 같은 공공부문으로 이직하거나 취업을 준비했다. 2008년 리먼사태 이후 2010년과 2011년 9급 공무원 경쟁률은 82.2%, 93.3%에 달했다. 2010년에는 7급 공무원 경쟁률이 115대 1까지 되었고.
9급 공채시험 경쟁률 추이. 인사혁신처 (박용필 기자)
많은 기업인은 정년이 보장된 공공부문을 부러워한다. 적어도 그들은 나라가 고용을 보장하니 기업처럼 쉽게 짤리지 않을 테니. 나 역시 반복해 쳐들어오는 칼바람을 마주할 때면 '정년 보장'은 공공부문이 가진 혜택으로 여겼다.
하지만, 정년보장이 혜택이 아닌 비애라는 생각을 하는 데는 반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퇴사 후 공공기관에서 기간제 일을 시작했다. 조직에 들어가지 않으려 했지만, 계획에 틀어진 돈이 나를 다시 집어넣어 버렸다.
정년이 보장된 조직, 사람들은 어떻게 일할까?
첫날 들은 말은,
"정년까지 있을 수 있으니 걱정 마라."
였다. 기간제로 온 내게. 기간제는 채용 공고문에 계약기간이 명시된 계약직 일자리이다.
계약직이기에 정년을 기대하고 온 게 아닌데 심히 당황스러운 멘트이다.
정년이 보장된 이곳. 밖에서 볼 때는 안정감 있어 보여 부러웠는데, 막상 들어와 보니 그렇지 않다. 정년 보장은 안정감을 주긴 하지만 대신에 사람을 제자리에 있게 한다는 걸 여실히 마주한다.
오늘날 한국 기업은 글로벌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 조직원 개개인의 역량을 높이기 위해 끝없이 자기 발전과 자기 계발을 독려하고, 최대 성과를 내도록 채찍을 가한다. 일과 중에는 정신없이 일하랴, 퇴근 후에는 자기계발하랴, 지칠 대로 지친 날이 많다. 노력하고 애쓰지 않으면 도태되기에, 생존이 위태로워지기에.
정년이 보장된 환경은 사람을 편안한 현재에 머물게 한다. 이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일반적인 사람의 특성이다. 변화보다는 익숙한 환경을 쫓고, 불확실한 도전보다는 안정을 쫓는.
자기 계발 - 굳이 필요치 않다. 그렇게 성과를 내는 것보다 상사에게 복종하는 게 더 빠른 길이니. 업무 역량을 향상하기 위한 대화는 지난 8개월 동안 들어보지 못했다. 그냥 그냥 상사가 시키는 일을 문제없이 해결하는 게 더 효과적이다. 고생스럽게 자기 계발을 한들 정년보장이라는 결과는 하지 않은 이들과 다를 게 없으니 효율도 낮고.
성과내기 - 꼭 필요치 않다. 조직에서 한 개인이 노력해 돋보이는 성과를 내는 건 쉽지 않다. 새로운 방식으로 일해 성과 내기보다는 이전 선배들이 하던 데로 따라 해 큰 사고 안 치는 게 더 낫다. 새로운 도전과 시도는 환영받지 못한다. 그래서인지 20~30년 전 업무 습관이 그대로 이어졌고. 결재문서는 전자시스템이 있어도 별도로 출력해 들고 가 보고해야 하고, 누군가는 거기에 빨간펜으로 고쳐 돌려주며 수정하라 하고, 시스템 결재는 3단계 이상이고...
또, 폐쇄적이다. 조직은 삼각형 구조로 위로 갈수록 권한이 커지는데, 정년보장 조직은 그것이 더 심하다. 나이도 많은 데다 직급도 높으니 그 조직에서는 하늘아래 무서울 것이 없다는 게 위에 있는 사람들이다. 그래서인지 윗사람 말이 절대권력처럼 군림한다.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고 조직 장기 성과에 불편을 주어도 별로 개념치 않는다. 자신의 승진을 위해서라면 조직이 받을 피해보다 상사의 지시와 인정이 더 필요하니까. 권한과 힘을 가진 사람은 새로운 변화를 거부한다. 자신에게 익숙한 체제가 유지되어 권한과 힘이 지속되길 무척이나 바라니까.
기업은 나이가 많고 직급이 높아도 성과가 없으면 구조조정 0순위가 되어 늘 긴장해 일할 수밖에 없는데, 정년보장 조직은 그럴 필요가 없다. 그래서 더 보수적이고 폐쇄적일 수밖에 없다.
정년보장 조직은 승진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승진은 직장인에게 짜릿한 성취감을 주는 이벤트이지만, 대상자 모두가 그 기쁨을 맛볼 수는 없다. 승진하는 사람이 있으면 누락된 사람이 분명 존재한다. 모든 사람이 승진할 수 있는 경우는 딱 두 가지이다.
하나는 조직이 양적으로 2배 이상 커 가는 경우이다. 실적이 아주 좋거나 전략적 의사결정으로 규모가 2배가 되면 외부 유입 인력이 많아지고 승진자가 앉을 수 있는 자리가 많아져 승진 기회가 많다. 통상 대기업 과장/책임 승격률은 40~60% 사이이고, 부장은 20~30%대인데, 2배 성장 상황이라면 평상의 1.5~1.8배 높은 승격률을 가져도 유지된다.
또 다른 경우는 직원들이 많이 퇴사하는 상황이다. 산업계 전반적인 인력 흐름이 많아 이동이 많은 때일 수 있고, 아니면 떠나는 조직에 심각한 문제가 있어서. 어쨌든 사람들이 떠나니 조직은 현상 유지를 위해 누군가로 빈자리를 채울 수 있으니, 승진 기회가 좀 더 많을 수 있다.
정년보장 조직은 이 두 상황을 모두 충족하지 않는 곳이 대부분이다. 급격한 양적 성장도 없고 퇴사율이 높지 않으니, 자연 승진하는 건 어렵다. 한참 전부터 켜켜이 승진 기회를 얻지 못한 이들이 쌓여있다.
이제 몇 번 승진 기회에서 탈락한 이들은 조직에 실망하고 자신감을 잃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친 듯이 일하는 사람을 아직 보진 못했다.
다음번 승진하기 위해 악착같이 열심히 일할 것이냐, 아니면 포기할 것이냐?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실제 현장에서는 후자를 더 많이 접한다. 포기하고 그냥 그냥 출퇴근하는 거지.
조직원 대부분은 성과와 칭찬에 목말라한다. 모든 사람은 사랑과 인정을 갈구한다고 심리학은 말한다. 그것이 충족되지 않으면 불안을 느낀다고 알랭드보통은 '불안'에서 말하고 있다. 물론 사람은 존재자체로 인정받아야 하지만 아직 사회 주류는 시험 같은 평가나 주변 인정을 통해 사랑을 느낀다. 사람에게는 인정과 사랑을 나타내는 칭찬이 필요하다. 칭찬은 코끼리뿐 아니라 모든 사람을 춤추게 하니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성인이 된 우리는 타인에게 칭찬하는 거에 너무나 인색하다. 특히 한국 조직 생활에서는 칭찬의 'ㅊ'도 구경하기가 쉽지 않다. 이는 기업이든 공공이든 매한가지이다. 조직 생활은 개인이 성과를 내 인정받기가 쉽지 않다. 성과주의를 쫓는 기업조차도 조직원의 성과를 계량화해 상과 벌을 명확히 하는 노력을 꽤 오래 했지만 여전히 부족하다. 조직은 한 개인 역량보다는 다수의 역량이 합쳐져 성과를 내는 목적으로 만들어져 있으니.
그러나 한 가지 차이는, 기업은 본인이 열심히 일해 일부 성과를 만들 수 있다. 그 성과로 개인 스스로 만족할 수도 있고. 하지만 정년이 보장된 조직, 특히 공공부문에서는 성과를 드러내기가 훨씬 어렵다. 그런 노력이 환영받지도 못하는 곳도 많고.
내외부 칭찬으로 우리는 인정을 느낄 수 있는데,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인색한 조직문화가 굳어져 내면은 늘 사랑에 목말라있다. 사랑을 받은 자가 잘 나눈다는 말이 떠오른다.
20대 청년들이 이런 조직에 와서 적응해 낼까? 쉽지 않을 거 같다. 주변에 정년이 보장되는 조직에 가기 위해 노력하는 이가 있다면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 권하겠다. 세상에 맞부딪혀 도전과 시도로 변화를 만들고,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 사회에 기여하기를 진심으로 권해 본다. 그것에서 성취를 느끼고 삶의 보람을 맛보길 정말로 원한다.
정년보장이 당장은 큰 혜택처럼 보인다. 인간 기본 심리인 불안을 잠재워주니. 특히나 IMF 이후 한국 기업은 여러 차례 위기를 크게 겪으며 고용불안을 겪었고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는 환경 속에서 기업인들 스트레스도 만만치 않은 건 사실이다. 하지만, 불안과 고통이 없는 편한 환경에서 인간은 성장할 수 없다. 변화와 긴장 없는 일상은 지루함을 느끼게 된다.
요즘 공공부문 취준생이 많이 줄었다고도 한다. 올해 공무원 경쟁률은 2010년 이후 최저이고, 한 때 핫한 공공기관 취준생도 많이 줄었다. 취직해도 정년보장을 버리고 나오는 이들도 많고.
공공영역의 일을 선호하는 이라면 상관없지만, 정년보장 때문에 간다면 별로 유쾌하지 않은 인생을 지낼 수도 있다.
누구나 언젠가는 조직을 떠나야 한다. 40대냐 50대냐 60대냐의 차이일 뿐, 영원히 그곳에 있을 순 없다. 한국의 정년 보장 연령은 대개 60 전후인데, 은퇴 후에 일 없이 살기엔 남은 생이 길다. 오늘날 한국인 기대수명은 83세이니 20여 년 더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 요즘은 70 전후 어르신들도 정정하시다. 언젠가는 조직을 한 번 떠나 다른 일을 해야 하는 거고, 그 연령이 좀 이르냐 늦으냐의 차이. 조삼모사 격이다. 50대에 회사를 나와 다른 일을 시작하느냐, 60대에 조직에서 나와 다른 일을 시작하느냐.
60에 은퇴해 놀겠다고? 그러기엔 오늘날 60은 청춘이다. 일은 꼭 돈만을 위해 필요한 건 아니다. 일 자체로서, 삶으로서도 중요한 생의 한 부분이다.
끓는 물에 개구리를 집어넣으면 살기 위해 바로 뛰쳐나가지만, 서서히 물 온도를 높이면 뛰쳐나가기보다는 그곳에 적응해 안주해 종국에는 죽어버린다. 천천히 일어나는 변화는 감지하지 못하니까.
아이러니하게도 사람은 위태로울 때 성장을 위한 동기부여가 발동하고, 불안할 때 안정을 위한 노력을 한다. 편한 상태에서는 변화보다는 그 상황을 유지하고 싶어지고. 앉으면 눕고 싶고, 누우면 자고 싶은 게 일반의 사람이다.
IMF 이후 지난 2~30년 동안 정리해고 겪은 이전 세대는 정년보장 사회에 익숙해있다가 마른하늘의 날벼락처럼 너무나 갑작스레 명예퇴직을 겪은 세대라 아픔이 특히 컸지만, 이제 우리는 안다. 명예퇴직과 권고사직은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걸. 미리 준비하면 슬기롭게 난관을 헤쳐나갈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를 발판으로 한 단계 성장할 수도 있고.
청년들에게 전하고 싶다.
정년보장의 안정보다는 다소 위태롭더라도 도전하고 성취하는 커리어를 시작해 보라고. 스스로 한계에 부딪혀야 비로소 한 단계 성장함을 알리고 싶다. 치열한 삶 속에서 살아남는 법을 터득해 강인해지길 바란다.
* 새끼 오리는 태어나 처음 만나는 이를 어미로 알고 따른다고 한다. 어쩌면 내게 기업 경영 환경과 경쟁 문화가 그것일 수 있다. 첫 사회생활을 시작해 20년 동안 마주한 세계가 더 친숙할지도. 그렇게 길들여졌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