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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선 Nov 23. 2019

보랏빛 향기 - 샹그리아와 아사이볼의 상관관계

무지갯빛 음식 일기 - 무. 음. 일기

유명한 가요 중 '그대 모습은 보랏빛처럼~'으로 시작하는 '보랏빛 향기'라는 곡이 있다. 1990년 발매되어 벌써 20년 가까이 된 곡이지만 최근까지도 리메이크가 되거나 드라마 OST로 쓰일 만큼 유명한 곡이기에 많이 들어봤을 것이라 생각한다. 보랏빛 향기라, 어렸을 때는 이 노래를 듣고 봄바람에 불어오는 라일락 향기를 떠올렸었다. 노래가 워낙 산뜻한 데다가 사랑에 빠진 사람이 불러야 할 것 같은 그런 느낌을 풍기지 않는가. 그런데 웃기게도 뜻밖에 내가 보랏빛 향기를 맡은 건 이 곳, 한국도 아니고 스페인에서, 그것도 심지어 사람이 아니라 음식한테서였다. 이렇게 말하면 다들 지어낸 얘기 혹은 끼워 맞춘 얘기라고 생각하겠지만 정말이다. 물론 먹으면서 노래를 불렀다거나 한 것은 아니지만 이상하게 이 음식들을 보고 있을 때면 어디선가 보랏빛 향기가 나는 것 같았다. 그 음식들은 바로 샹그리아와 아사이볼이다. 다만, 두 음식 모두 스페인에서 탄생하고 스페인에서만 먹는 음식들은 아니다. 아사이볼의 경우 브라질의 대표적인 디저트이며, 샹그리아는 스페인뿐 아니라 포르투갈에서도 흔히 즐길 수 있는 음료이기 때문이다. 한 때, 아사이볼이 다이어트에 도움이 되는 디저트라고 해서 잠시 반짝 유행하던 시기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다이어트식이라고 해서 맛없는 음식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니 첫인상으로만 판단하지 않길 바란다. 그렇다면 샹그리아와 아사이볼이 단순히 보라색이라는 공통점만 가질까, 같은 향인 듯 다른 두 음식에 대해 지금부터 살펴보려 한다. 



샹그리아의 향기

어렸을 때, 그러니까 술을 마시지 못했던 고등학생 때 우연히 샹그리아라는 걸 보게 된 적이 있었다. 그때 얼마나 샹그리아가 맛있어 보였는지. 술을 한 번도 안 마셔봤으니 당연히 와인 맛도 몰랐던 나는 당시 와인조차도 포도로 만들었으니까 포도주스 맛이 나겠지 생각했던 데다가, 그런 포도주스에 과일까지 들어가 있으니 그보다 더 맛있는 술이 어딨겠는가 생각했었다. 이런 샹그리아를 제대로 먹어본 건 지난여름, 스페인에서였다. 사실 우리나라에서도 지금은 많이 팔기는 하지만 상대적으로 다른 술들에 비해 가격이 높기도 하고 아직 돈 없는 대학생이라 와인을 마시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접하기 쉽지 않았었다. 그런 나에게 스페인에서 샹그리아를 마신다는 건 최고의 기회였고, 주변 사람들도 스페인의 샹그리아는 맛이 다르다며 극찬했기 때문에 마셔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과일이 가득 올라간 샹그리아


샹그리아는 칵테일의 일종으로 스페인어의 '피(sangre)'라는 단어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겨울보다는 여름에 주로 마시며 레드와인에 다양한 과일들과 탄산수, 설탕 등을 넣어서 일정 기간 숙성시킨 후 마시는 와인이다. 과일은 오렌지, 사과부터 베리류까지 다양한데, 참고로 항상 샹그리아를 마실 때면 친구와 안에 들은 과일을 함께 먹는 건지 아닌지에 대한 논쟁이 붙곤 했었다. 아직도 그 해답을 못 찾았으니 혹시나 이를 아시는 분은 댓글로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다.


스페인의 샹그리아

그런데 스페인 사람들은 모두 샹그리아를 마시는 줄로만 알았던 친구와 나에게 스페인 사람들이 생각하는 샹그리아는 조금 달라서 충격을 받기도 했었다. 물론 스페인 사람들에게 익숙한 음료이기는 하지만 샹그리아는 주로 관광객이 마시는 술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관광지 주변의 음식점을 가면 샹그리아를 많이 팔지만 현지 식당에서는 샹그리아를 팔지 않고 사실상 맥주나 와인을 더 즐겨 마신다고 한다. 이 사실을 몰랐던 우리는 처음 스페인에 갔을 때 샹그리아를 무조건 마셔야 한다는 생각에 온종일 샹그리아를 찾아다녔는데 몇몇 식당에서는 샹그리아를 팔지 않는 걸 보고 의아해하기도 했었다. 


특이한 건, 우리에게는 아무도 말해주지 않은 사실이었지만 스페인 사람들은 띤또라고 흔히 불리는 'Tinto de verano'를 더 즐겨마신다는 것이었다. 내 주변은 몰랐던 건지, 아니면 알고서도 안 알려줬던 것인지(!) 모르겠으나 이 글을 읽고 스페인에 간다면 스페인 사람들처럼 띤또를 찾아보는 게 어떨지. 띤또 데 베라노는 샹그리아와 비슷한 맛이지만 만들기 훨씬 쉽기 때문에 스페인 식당에서 더 찾아보기 쉽다. 이는 레드와인에 레몬 슬라이스와 탄산음료를 섞어 만든 술로, 마실 때 정말 포도 탄산음료를 마시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마치 요즘 과일 막걸리들이 많은데 우리는 그냥 막걸리나 꿀막걸리를 더 자주 찾는 그런 경우와 비슷하달까. 어디서나 현지인들에게는 만들기 쉽고 저렴한 것이 더 대중적으로 다가오는 게 당연한 현상이니 보기 좋고 맛도 좋은, 정성도 가득한 샹그리아가 현지인들보다 관광객들에게 사랑받는 건 이상하지 않아 보인다.


스페인에서 마셨던 띤또 데 베라노

그래도 결국 관광객이었던 우리에게는 띤또 데 베라노보단 보기도 좋고 사진도 잘 나오는.. 그런 샹그리아가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스페인의 도시들은 노란 햇살이 항상 가득했던 노랑 혹은 주황 빛깔의 장소였는데 그런 도시와 보랏빛의 샹그리아가 참 잘 어울리는 게 묘하다고 생각된다. 어두운 불빛의 식당에서 멋있게 한 잔 기울이는 것도 충분히 좋았지만 햇살 가득한 야외 테라스에서 샹그리아가 노란빛의 식탁과 어우러질 때 보랏빛 향기가 배로 늘어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스페인의 도시들에서 오묘한 보랏빛이 도는 건 그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사이볼의 향기

아사이볼은 아사이베리로 만든 스무디에 각종 과일을 얹어서 간편하게 먹는 일종의 디저트라고 할 수 있다. 아사이베리는 멀리 있는 브라질, 아마존 쪽에서 주로 생산되는 과일로 노화방지, 피부 개선, 체중 감량 등의 효과가 뛰어나 건강식품으로 여겨지며 아마존에서는 '젊음의 샘'으로 부르기도 하는 과일이다.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다른 과일들에 비해 유명하지는 않지만, 위에서 말했듯이 몇 년 전부터 한국에서도 건강에 좋은 과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나도 사실 아사이베리를 직접 본 적은 없었고 주로 아사이 스무디, 혹은 아사이 볼로만 접했었던 기억이 있다. 특히 고등학생 때 학교 바로 앞에 아사이볼을 파는 가게가 있었는데(당시에는 상당히 혁신적인 디저트고 맛이었다) 장사도 꽤나 잘됐던 것으로 기억하고, 학교에서 주는 급식만 먹던 우리 같은 고등학생이 짧은 시간 동안 부릴 수 있던 조그만 사치였기 때문에 한 달에 몇 번 친구들과 설레는 마음으로 갔던 생각이 떠오른다. 그러나 슬프게도 아사이볼이 한국에서는 큰 인기를 끌지 못해서 금방 가게가 사라지고 말았는데, 그 이후에도 아사이볼을 파는 곳이 몇 군데 없어 한국에서 더 이상 맛볼 수 없었다. 


그러다 우연히 스페인에서 친구들과 아침을 먹기 위해 카페에 갔는데 아사이볼을 비롯해 다양한 종류의 스무디 볼을 파는 걸 보게 되었고, 정말 몇 년 만에 다시 아사이볼을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무척 설렜었다. 어렸을 때 맡았던 그 보랏빛 향기를 너무나도 오랜만에 다시 맡으니 왠지 그 시간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나중에 찾아보니 다른 유럽 국가들에서도 카페에서 아사이볼을 파는 걸 볼 수 있었는데, 특히 비건 식당이 많은 유럽에서 아사이볼을 찾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단 걸 한국에 돌아올 쯤에야 알게 되었다. 아사이볼은 과일이 많이 들어가 있으면서도 그래놀라와 요거트를 넣어주는 곳도 있어서 한 끼 대용으로도 거뜬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고 한다. 물론 디저트로 시작한 음식인 만큼 단 맛이 강하고 가볍기 때문에 밥을 먹어야 한 끼를 먹었다고 생각하는 나와 같은 한국인들에겐 이해할 수 없는 일이기는 하다. 그리고 아사이볼을 스페인에서 오랜만에 접한 건 사실이었지만 아사이베리가 아마존에서 온 것인 만큼 아사이볼이 처음 생겨난 곳도 당연히 스페인은 아니다. 혹시나 오해하시지 말길. 


스페인 한 카페에서 먹었던 아사이볼

 아사이볼은 보기에도 참 예쁘다. 보라색을 띠는 아사이 스무디 말고도 형형색색의 과일이 잔뜩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과일을 넣는 기준은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고 식당마다,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다른 곳에 가서 아사이볼을 시킬 때면 어떤 과일을 얹어줄지 기대하는 맛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다른 과일들에 가려져 있다 해도 아사이볼을 볼 때면 언제나 향긋한 보랏빛 향기가 코를 감싼다. 상큼하면서도 이국적인 가득한 그런 향. 이제 날씨가 많이 추워져서 차가운 아사이볼을 먹기에는 힘들겠지만 이런 점심에 자꾸만 보랏빛의 아사이볼이 떠오른다.




생각해보면 두 음식 모두 보랏빛 향기가 나지만 동시에 과일이 들어가 있어서 상큼하고 달달한 향이 강하다. 그리고 식사 대신 (혹은 식사랑 같이) 먹을 수도 있고 식사 후에 디저트로 먹을 수도 있다는 공통점도 있다. 물론 내가 두 음식에서 맡았던 보랏빛 향기는 각각 조금 다른 느낌의 것이었지만 두 음식에서 느꼈던 보랏빛 향기는 다른 음식들에게서는 느낄 수 없었던 이국적이면서도 달달한 그 향이었다. 내가 나중에 또 다른 보랏빛 향기를 발견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지난여름 맡았던 보랏빛 향기는 앞으로도 절대 잊히지 않을 것 같다. 날씨가 추워지며 세상이 점점 하얀빛으로 물들어가는 요즘, 노란색의 도시에서 맡았던 보랏빛 향기가 더욱 그리워진다. 


배경 사진 출처: http://simplyjandk.com/acai-bow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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