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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llalawoman Oct 13. 2022

내 안에 숨겨진 야성에 대하여

가면을 벗는 삶

어떤 사건 때문인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8살의 저는 쌓인 이불에 얼굴을 파묻고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 가슴의 화가 가득 차올라 심장이 엄청나게 커져버린 기분입니다. 아무도 근처에 오지 못하게 방문을 걸어 잠그고 있어요. 무언 가에 굉장히 화가 난 것 같습니다.

어떤 날은 옆에서 잠든 동생이 깰까 봐,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소리를 내지 못하고 울었습니다. 낯설고 외로운 나는 가족에게 들킬까 걱정하며 숨죽여 울었습니다.


어린 시절에 나는 감정이라는 것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내가 느끼는 모든 감정들에 혼란스러웠습니다.

아버지의 일로 잦은 전학을 다니게 되었고, 그때마다 어린 나는 새로운 환경과 친구들에게 적응하기까지 굉장히 힘들고, 괴로운 시간을 감내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내가 괴로웠다는 사실은 부모님도 친구들도 알지 못합니다. 나는 언제나 공부 잘하고 친구도 많고 재미있는 아이였으니까요. 그것은 내가 만들어낸 가면이었습니다.


새 학교에 전학을 간 첫날 첫 쉬는 시간에는 언제나 옆 반 친구들까지 나를 둘러싸고 관찰했습니다. 순수한 아이들의 세상을 읽어가는 보편적 방식이었습니다. 나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친구들에게 '만나서 반가워!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라고 말하는 성격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보여주고 말겠어, 내가 어떤 사람인지'라는 마음으로 낯선 인간을 경계하는 어린 삵과 같이 으르렁거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나는 '예의 바르고, 차분하고, 온화한 사람'입니다. 12년 공교육의 기록 속에도 '온화하며, 친구들과의 유대관계가 좋고, 성실함'이었습니다.

반장 부반장뿐만 아니라 학생회장의 감투까지 썼으니, 유대관계가 좋고 성실하다는 사실을 12년 인생으로 증명해냈습니다. 모순이 있다면, 나는 가면을 썼던 것이기에 그 안의 모든 관계들이 기억나지 않습니다. 가면에만 충실했기 때문이지요.


사회에 나와서도 가면은 절대로 벗지 않았습니다. 남들보다 빨리 승진하고, 인정받는 공식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 모습이 본래의 나라고 믿어왔습니다. '나는 마음이 강하고 잘 내색하지 않아. 나는 무엇이든 해내는 사람이야.' 하지만, 점차 나의 본모습을 알아 가면서 많은 혼란을 느꼈습니다. 인생 전체에 의문이 들었습니다.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


나는 오감이 매우 민감한 사람입니다. 세상의 모든 소리와 모든 냄새, 촉감 모든 것에 말입니다. 잠을 깊고 편하게 잔다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 잘 모릅니다. 숨을 쉬는 모든 순간에 긴장을 하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시간들은 나의 감정과 생각에 충실한 삶이 아니었습니다. 언제 바뀔지 모르는 환경에 대해 긴장하고 대비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도 깊은 마음을 주지 않았습니다. 나는 언젠가 떠나게 될 사람이었으니까요. 따라서 감정을 표현하는 일도 참았습니다. 어차피 사람들이 나에 대해 알기 어려운 일일 테니까요. 이것이 내가 살아온 삶이었습니다.


안전망이 없는 아주 높은 구름사다리를 걷고 있는 사람. 바로 나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쉽게 행복해지고 쉽게 불행해지는 많은 감정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것을 알게 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관계에서 자유로운 나이가 되니 나도 모르게 불쑥불쑥 드러나는 생각과 감정들이 스스로 이해하고 있던 나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때때로 무모한 몽상을 합니다. 민감한 감각은 나를 우주로 사막으로 고통 속으로 환희 속으로 쉽게 밀어 넣습니다. 특히 여행과 책은 나를 희로애락 속으로 끌어당겨 자유로운 영혼이 되게 만듭니다.

여행은 나를 관계에서 자유로워지게 만듭니다. 나는 감정에 솔직하고, 직설적이고 감정을 숨기지 못합니다. 책을 읽는 동안 역시, 그 안에서 자유롭고 거침없는 나를 발견합니다.

이것이 ‘나’라는 것을 진작에 알았더라면, 가면을 벗는 법을 진작에 알았더라면 지금 어떤 인생을 살고 있었을까 참 궁금합니다.

긴 시간을 본래의 모습대로 살지 못했음이 아쉽지만, 어떤 사람인지 더 늦기 전에 알아서 참 다행입니다.

이제라도 나를 마주할 수 있어서 참 다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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