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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일라 Jun 03. 2023

튀르키예 지진이 만나게 해 준 사람들과의 합숙생활

지진이 난 튀르키예로 가다 (5) 

튀르키예에 구호활동을 위해 도착한지 6일차가 되었을 무렵, 그곳에서의 생활도 벌써 많이 익숙해졌다. 일주일동안 샤워를 못 하고, 난방이 되지 않아 세수와 양치도 찬물로 해야 했지만 지내보니 별 일이 아니었다. 계절이 겨울인 것이 다행이기는 했지만, 한국에서는 이틀만 머리를 안 감아도 되게 더러운 느낌이 들곤 했는데.. 생각해보면 다 환경에 따라 맞춰지는 것이다. 내가 정해놓았던, 혹은 사회적으로 정해지는 많은 기준들은 생각보다 큰 의미는 아닌지도. 


사실 도착한 첫 날 씻는 것보다 걱정이 된 것은 좁은 공간에서 많은 사람들과 함께 자는 것 때문이었다. 열 명 이상이 한 공간에서 자야 했다. 난 잠드는 데 시간이 걸리는 편이었고, 소음이 있거나 생각이 많거나 해도 쉽사리 잠에 들지 못하곤 했다. 다행히 잠들고 나면 소음이 나도 잘 수 있지만. 학교 교실이었던 우리의 숙소에서는 사람이 다닥다닥 머리를 맞대고 두 줄로 누워야만 했다. 그야말로 옆에 있는 사람이 바스락거리기만 해도 고스란히 내 귀에 다 전달되는 것이다.


나는 괜찮을 거라고 여겼지만, 첫 날부터 옆 자리에 누운 선생님이 코를 고시는 바람에 첫 날의 수면을 엄청 뒤척여야 했다. 그러나 누가 뭐라 할 수 있을까. 출국 날부터 타지에서 이동하고, 의료물품을 함께 챙기고, 장시간 비행을 한 뒤 몸을 뻗고 맞는 첫 수면이다. 평소에 코를 골지 않아도 그날은 골 수밖에 없는 피로가 있었을 테다. 그러나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잠들지 못하는 몸은 그럴 수 없었다. 한 번 코골이를 의식하는 순간 몸이 아무리 피곤해 잡고 늘어져도 정신은 깨어 분투하는 것이다. 그래서 첫날 나는 앞으로 어떻게 남은 날을 버텨야 할까 하는 생각에 암담했었다. 누군가를 도우러 왔는데 도리어 지쳐서 짐만 될까봐였다. 


우리가 묵었던 마라쉬 시내에 있던 한 초등학교.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가 두세 사람씩 호텔방으로 나뉘어지지 않고 '모두 함께' 공간을 나눠 쓰며 시간을 함께하는 일은 더한 축복이었음을 깨달았다. 무엇보다 지진으로 인해 그곳을 피난처 삼은 터키인들도 만날 수 있었다. 사실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는 훨씬 좋은 환경이었다. 출국 전에는 우리 모두 지진의 위험과 숙박시설의 여의치 않음으로 인해 텐트에서 묵어야 한다고 들었는데, 학교 건물에 묵을 수 있게 된 것이었다.


다행히 옆에서 주무시는 선생님의 코골이는 그 날만큼 심해지지 않았고, 하루가 너무 피곤했기에 나도 금방 지쳐 잠들 수 있었다. 조금이라도 따뜻하게 하려고 덮었던 군대 비닐담요 소리는 정말 말도 못하게 시끄러웠는데, 그 소리를 듣고도 잘 잤던걸 보면 그 생활에 완벽적응을 했던 것 같다. 보일러가 안 되서 온수가 없기에 일주일동안 머리는 당연히 못 감을 줄만 알았는데 차디찬 냇물같은 물로 머리감기를 도전하자 두 번째는 더 쉬웠다. 처음에는 전기포트에 끓인 물로 옆에서 한 명이 따뜻한 물을 부어줘서 미지근한 물을 만들어 머리를 감고.. 아주 난리도 아니었다. 맨 처음에는 그 찬물의 온도가 너무 충격적이어서 머리를 만지는 손이 다 얼 정도였는데.. 그때 옆에서 부어주던 따뜻한 물이 손을 녹이던 그 생생한 느낌을 아직도 기억한다. 


바로 이 담요임. 분명히 비닐쪼가리 같았는데.. 아침에 일어나서 땀인지 뭔지가 맺혀 있어 충격이었다. 


아침마다 누룽지를 뜨거운 물에 풀어 아침식사를 하고, 커피믹스를 타며 하루의 사역을 준비하는 우리는 정말 놀라울 정도로 한국인이었다. 현지에서 나눠주던 빵이나 고기 등을 먹으면서도 김치 반찬이 누군가로부터 한두 가지씩 나오던 그 순간을 잊을 수가 없다. 그 모든 것들을 어마무시하게 준비해온 손길도. 정말, 어떤 음식에도 김치만 있으면 한식이 되어버리는 그 놀라운 식사. 찬물 세수나 음식이 조금 입에 맞지 않거나 날이 추워도, 우리의 시간은 놀라울 정도로 따뜻했다. 날마다 웃음이 있었고 감사가 넘쳤다. 


모든 것이 무너졌던

그곳에서. 


네 명의 의사, 아홉 명의 간호사, 나를 포함한 세 명의 청년. 우리는 어떻게 만날 수 있었나. 지진이 아니었다면 우리도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를 묶어준 것은 한 가지의 사명이었다. 튀르키예의 고난에 응답하기 위해서. 각자 나이도 다르고 살아온 환경도 인생에서 원하는 것도 다 다르지만, 누군가의 어려움 앞에 우리는 놀라울 정도로 한 마음이 되었다. 또한 우리가 이 나라를 사랑하며 섬기는 동안에 서로를 사랑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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