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도를 내야 할까, 걸어도 될까

by 여슬

80년생인 내가 자란 강남은 한가하면 한심한 아이 취급을 받았다. 인천 토박이 남편은, 학교 동아리 활동만 했다던데 말이다.

학부모가 된 우리 부부는 갑자기 머리가 복잡해졌다. 남편은 사교육을 다양하게 경험한 나에게 모든 책임을 넘겨주며 교육비가 얼마인지만 알려달라고 했다. 계산기를 두드리다 한없이 커지는 숫자를 보고 그만뒀다.

내가 고등학교 졸업까지 낸 교육비를 전부 모았다면 얼마였을까. 그 돈을 지금 대출금 상환에 보태고 싶은 내 마음을 남편은 알까.

답답한 마음에 한 달 용돈으로 오천 원을 받는 딸과 기획회의를 시작했다. 학원을 원하는지, 목돈을 원하는지 물어보는 나는 음흉함 그 자체였다.

순수한 딸아이는 어른이 되면 받을 목돈을 선택했고, 자연스럽게 엄마표 공부를 시작했다. 엄마표는 시작은 순조로웠지만 어느 날 아이 일기장에서 본 ‘엄마’ 2행시는 충격적이었다.

엄! 엄마는, 마! 마녀다. 아이 손으로 이마를 직격탄으로 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경단녀이고 초보엄마인 내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경력은 콘텐츠 기획 팀장 시절 기획서 써내던 능력 뿐이었다. 무보수 연구 끝에 아예 다른 형식으로 엄마표를 개선했다.

우선, 엄마표 공부의 중심이던 채점과 설명을 과감하게 없앴다. 대신에 아이가 새롭게 알게 된 내용이 무엇인지만 묻고 격려했다. 그러자 아이와의 관계도 점점 회복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내게 남은 의문은 내 아이만 한가롭게 걷고 있는 것 같은 불안함이었다. 지금 나는 일하는 엄마이고 나의 고객은 학생과 학부모이다. 치열한 사회로 내보내기 전 아이들이 갖추어야 할 역량을 제시하고 교육 방법을 설득하는 직업이다. 그러니 이 시대의 속도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다른 집 아이들은 뛰는 중이거나 펄펄 날고 있는 아이들도 있다.

아이에게 인생에서 낭비하면 안 되는 세 가지는 돈, 시간, 그리고 노력이라는 말을 해준 적이 있다. 마가렛 대처의 아버지가 한 말인데, 참 멋지다. 하지만 육아는 돈과 시간과 노력과의 균형찾기 게임이다. 심지어 놀이공원 조차도 능력있는 부모를 시험한다. 아이와 함께 캠핑의자를 접었다 폈다 하며 한참을 줄 서있는데, Q-pass 입구로 쑥 들어가는 사람을 나와 딸이 동시에 보았다. 사실, 예전에 한번 약간의 돈을 더 지불하고 Q-pass를 이용한 적이 있었다. 시간을 줄일 수만 있다면 어느 정도 돈을 쓰는 것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하지만 '시간의 공평함'을 딸에게 짚어주고 싶었다.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시간만 공평하다고 설명하니 겨우 아홉살 딸이 간신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 시간마저도 돈으로 쉽게 바꾼다면, 작은 숨구멍마저도 막혀버리는 더러운 세상이 올 것 같은 엄마의 불안함도 얘기해 주었다. 나 따위가 무슨 이런 걱정을, 하다가도 나부터 시간의 공평함을 인정하고, 남겨두어야 할 가치로 두고 싶다.

인생은 이율배반적인 쇼다. 프리랜서 강사인 내 별명은 '시아준', 시간을 아껴주는 준이다. 난 무엇을 위하여 타인의 시간을 아껴주며 밥벌이를 하고 있을까.

다시 한번 스스로에게 묻는다. 속도를 내야 할까 천천히 걸어도 될까. 정답은 무언가를 들여다볼 때 찾게 된다. 여기저기 괜한 청소를 하다가 아이 책상에서 방과 후 한자 교재가 눈에 들어왔다. 주르륵 페이지를 넘겨보는데, 한자어 ‘성공’이란 글자에서 손이 멈추었다. 이룰 성과 공 공인데, 이룰 성(成)은 도구를 써서 사물을 만들어 목적이 이루어지는 것을, 공공(功)은 힘과 절굿공이가 합쳐진 글자였다. 온 힘을 다해 절굿공이로 흙담을 쌓는 모습을 형상화한 글자란다.

성공이란, 목적을 이루는데 들인 노력과 수고이다. 그러면 ‘성공’의 본질은 ‘과정’이다. 얼른 공책을 찾아 성공의 진짜 의미를 기록해 두었다. 그래, 내 아이는 남들과 다른 방향으로 걷게 하도록 하자. 차근차근 아이와 함께 걸으면서, 삶을 재미있게 사는 기술을 더 알려주고 찾아가 보자. 그렇게 자란 아이가 어른이 된 날, 우윳빛 막걸리 잔을 놓고 아이와 한 잔 하고 있는 나를 상상해 본다. 그날 아이에게 엄마 2행시를 다시 지어줄 수 있는지 물어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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