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연의 장편소설 ‘불편한 편의점’에서는 노숙자와 홈리스를 구분한다. 노숙자와 달리 홈리스는 집(home)이 필요 없는(less) 사람이라고 한다. 그 말이 그 말이라고 생각했던 나의 무지함을 반성해야겠다. 소설 주인공 '독고' 씨의 지난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가 집이 필요 없는 이유는 예상보다 평범한것이다. 마치 독고씨가 우리 동네 편의점 어딘가에서 일하고 있을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다. 집이 필요 없는 이에게는 이토록 명료한데, 집이 필요한 사람들은 집을 자로 재고, 등급 매기기에 열심을 다하는걸까.
10년째 살고 있는 지금 아파트는 신도시에서도 끝자락에 있다. 지하철 역도 멀고, 초등학교를 품고 있지 않은 아파트여서인지 상가에도 학원이 단 하나만 있다. 식탁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면, 푸른 나무들이 정갈하게 서 있다. 입주할 때는 면봉 같았던 나무들이 내가 물을 주지 않아도 제법 자라서 그늘도 만든다. 쑥쑥 자라는 나무처럼 돌쟁이 아가도 함께 자라서 초등학생이 되었고, 고등학생이 되어갈 이 신도시 고즈넉한 테두리가 마음에 든다. 걷는 아이들을 좀처럼 보기 어려운 신도시에서 딸아이만큼은 왕복 30분 이상 걸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더욱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내가 독특한 걸까. ‘초품아’(초등학교를 품은 아파트)가 아니어서 이곳은 그리 인기 있는 집은 아니다.
내가 어릴 적 초등학교는 도보로 20분 넘는 거리였고,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가 있었다. 사물함은 있었지만, 숙제를 해야 하니 어깨가 녹아내릴 만큼 책가방이 무거웠다. 인신매매라는 말도 있었고, 개구리 소년 실종사건도 있었던 겁나는 세상이었다. 나의 학교는 어떤 아파트와도 인접해있지 않아 모든 아이들이 어느 집에 살든지 20분 이상은 걸어와야만 했다. 그 20분 덕분에 봄에는 꽃구경을 하교 등교할 수 있었고, 겨울에는 눈 덩이를 만지며 걸어보는 작은 도보 여행이 허락된 낭만적인 때였다.
언젠가 근무 중였던 나에게 딸이 문자 메시지를 보내 왔다. 하교할 때 교문에서 대기하던 학원차를 타고 순식간에 사라지는 친구들 틈에서 혼자서 집까지 오는 길이 길게 느껴진다는 내용이었다. 나도 마침 신도시 테두리에 사는 나를 대신해서 집값 걱정을 해주는 주변인들로부터 귀를 막고 싶었던 참이었다. 집까지 함께 걸을 친구들을 가로채는 학원차들이 미운 딸과 나에게 지금 당장 필요한 건 바로 스피드. 한 가지 프레임에 갇히지 않고 빠져나오려면 어서 순간이동을 해야 한다.
아홉 살 딸과 이런저런 작전을 짜본 결과 나보다 아이가 먼저 프레임을 박차고 빠져나갔다. 아이가 혼자 걸어오다보니 두 가지 대단한 발견을 하게되었다는 것이었다. 한 가지는, 보도블록을 가만히 보면서 걸으니 여러 가지 음식처럼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자주색은 고구마블록, 노란색은 치즈블록 이렇게 구경하면서 오니 즐거웠단다. 또 하나는 다리가 아플 때 쉴 수 있는 바위가 생겼다며, 아지트가 생겼다는 것이었다. 안도감과 동시에 찾아온 엄마의 걱정은 어쩔수 없나보다. 혹시나 외진 곳에 있는 비밀장소일까 봐 저녁을 먹고 아이 손을 잡고 아지트를 방문했다. 다행히 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나무 아래 아이 엉덩이 크기의 그냥 돌이었다. 그냥 돌멩이인데, 갑자기 아이가 침 발라놓은 돌의자 같아 사랑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모두가 비슷한 신도시 아파트여서 다들 지루한가 보다. 누군가 만든 카피, 초품아가 입소문을 타고 유행어가 된 것을 보면 말이다. 전문 카피라이터는 아니지만 나는 나와 남을 나누고 가르는 카피는 별로라고 느낀다. 일단 초등학교를 품고 있지 않은 이 세상 모든 집을 위하여 내가 간지 나는 카피를 만들어 보아야겠다. “다양한 이야기가 생겨나고 간직되는 곳, 이야기를 다 품은 집, 다품家”
아, 창피하다. 모든 카피라이터 분들을 존경하며 재빠르게 이 글에서 빠져나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