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가 딸아이의 좋은 모델이 되지 못한 것에 대해 안타깝게 생각한다. 통탄한다고 말할 정도는 아니지만, 아쉽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안타깝게 생각한다. 유감이다.
나는, 내가 딸아이의 좋은 모델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지금의 내 모습에 크게 불만은 없지만, 다른 모습의 나를 딸아이가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딸아이 정도로 나와 가까이 있어야 내가 가졌을지도 모를 성공과 실패의 이야기를 확실히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사회적 고용관계 속에 포함되어 나의 노동과 시간이 어떤 식으로든 평가받는 삶을 살았더라면, 그것이 나에게도 또한 딸아이에게도 좋았을 거라 생각한다. 직장에서 자신이 맡은 업무를 통해 노력한 만큼, 수고한 만큼 그에 대한 정당한 보수를 받고, 그러면서도 말이 통하는, 바쁘지만 다정한 엄마가 되었더라면 좋았을 거라 생각한다. 일과 가정 사이에서 힘들지만, 힘든 상황을 어떤 방식으로든지 헤쳐나가는 워킹우먼의 삶을 딸아이에게 보여주었으면 좋았을 거라 생각한다. 압박과 긴장을 이겨내고 능력 있는 워킹맘으로서의 삶을 딸아이에게 보여주었으면 좋았을 거라 생각한다. 그러한 여성의 표본이 나였으면, 딸아이의 엄마인 나였으면 좋았을 거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나는 예전의 결정,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아이를 전적으로 돌보기로 한 결정을 후회하는가. 글쎄, 잘 모르겠다. 만약 내가 『당신 인생의 이야기』 속 외계인 헵타포드처럼 결과를 알고 현재를 선택할 수 있다면, 이미 알고 있는 결과를 위해 원인으로 충분한 결정을 현재에 내려야 한다면, 나는 다른 선택을 했을까. 직장생활을 계속했을까.
글쎄…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아마, 난 회사를 그만두었을 것이다. 나는 현재와 똑같은 결정을 내렸을 것이다.
같은 학교에서 같은 공부를 하고 같은 직업을 갖고 있는데, 저는 만신창이가 되고, 남편은 아무런 손실도 입지 않은 채 어엿한 4인 가구의 가장이 되었습니다. 남편은 제 모성애로부터 막대한 수혜를 입었습니다. 남성이라는 것 자체가 이토록 강력한 권력이라는 것을 저는 처절하게 깨달았습니다. 모성애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아서 아이를 24시간 어린이집에 맡겨도 괜찮으면 좋으련만, 도저히 그렇게는 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대부분의 엄마가 경력 단절 여성이 되는 이유이고, 절차입니다. ([소녀, 설치고 말하고 생각하라], 59쪽)
나는 모성이 부족한 사람이다. 아직도 “누구 엄마?”라고 부르면 바로 반응하지 못한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을 부르는 것 같아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학기 초에 총회를 왜 안 갔냐는 친한 집사님 질문에, 솔직히 대답했더니 좋은 엄마이자 천성이 착하디 착한 집사님의 눈이 동그래졌다. “저는, 아이 학교 생활이 사실 별로 안 궁금해요. 담임 선생님도 좋은 분 같고. 뭐, 특별한 일도 없는 것 같고, 아침에 신나게 달려가는 거 보면 학교가 아주 싫지는 않은 모양이에요. 저는 그냥 그 정도면 만족해요.”
이런 내가, 아이들에게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방목에 가깝게 아이들을 키우고 있는 내가, 그때는 그런 결정을 했다. 회사를 그만뒀다. 직장을 때려치웠다. 나를 알아가려는, 나를 좋아하는, 나를 통해 세상을 배우고 싶어 하는 아이의 또렷한 눈망울이 내 걸음을 붙잡았다.
불안을 다룰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을 솔직히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일하는 엄마라면 '나는 사회적 성취와 경제적인 것이 굉장히 중요한 사람이구나' 하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것이 아이를 일보다 덜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스스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전업주부인 엄마도 '나는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이 무엇보다 중요한 사람이구나'라고 인정하고, 이렇게 살면 자신의 삶이 도태될 거라는 오해는 버려야 한다. 인정하고 오해하지 않아야 불안이 해결된다. ([불안한 엄마, 무관심한 아빠], 236쪽)
나처럼 모성이 부족한 사람도, 아이를 두고 일하러 가지 못 했다. 나는, 친정과 시댁에서, 양쪽 부모님들이 서로 아이를 봐주겠다고 하는데도, 그럴 수 없었다. 아이를 맡길 수 없었다. 내 아이를, 쫑알쫑알 말하고, 하루 종일 노래하고, 온몸으로 사랑하고, 뽀뽀하고 달려드는 내 아이의 순간 순간을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나의 계획과 미래보다 컸다. 나는 그걸 인정해야 한다. 그 순간, 그 때의 그 결정이, 내게 최선이었다는 걸 말이다.
“당신이 그렇게 차분할 수 있는 건 남들보다 ‘이상적인 엄마’에 가깝다는 자신감이 있어서가 아닐까요? 그러자 그래프는 고개를 저었다. “당신 같은 일하는 엄마들은 죄책감을 느끼면서 ‘나는 괜찮은 엄마인가? 아이들과 충분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걸까’라는 걱정을 하죠. 나 같은 전업주부 엄마들은 날마다 이런 질문을 던져요. ‘이 정도로 충분한가? 내 선택이 과연 옳은 걸까? 나도 일을 할 걸 그랬나? 내가 받은 교육은 다 무슨 소용이람?’ 양쪽 다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는 거죠.” 그렇다. 엄마들은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으며, 자신이 포기한 ‘저편의 삶’에 대해 보상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낀다. ([타임 푸어], 281쪽)
워킹맘도, 전업주부도 일정 정도의 죄책감, 또한 얼마만큼의 후회를 안고 산다. 자신이 포기한 ‘저 편의 삶’에 대해 아쉬워한다. 자신의 결정이 옳은 것이었는지 생각한다. 아이 준비물을 챙겨 보내지 못한 워킹맘이 생각하고, 뭐든 엄마가 해달라는 철부지 아이와 실랑이하는 전업주부가 생각한다. 엄마가 직장생활을 해서 아이 공부 습관을 제대로 잡아 주지 못했으니 학원에 보내야겠다고 워킹맘이 생각하고, 공부 습관 잡아주려고 아이와 이렇게 싸우느니 차라리 학원에 보내는 게 낫겠다고 전업주부 엄마가 생각한다. 양쪽 다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다. 엄마,라는 이름을 가진 이상 워킹맘도, 전업맘도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과거의 내 결정을 후회하지 않기로 했다. 내 딸아이에게, 훌륭한 역할 모델이 되어 주지 못한 것이 내심 아쉽기는 하지만, 내 결정으로 인해 아이들이 약간의 혜택을 입었다는 사실마저 모른 척하지 않기로 했다.
내 삶에 대해 후회하지 않고, 더 이상은 아쉬워하지 않기로 했다.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주 작은 것이 확실함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 속 모성이 내린 결정을 존중하고,
작지만 소중한 모성의 감정을 부정하지 않고,
내가 아이를 돌봤던 시간이 길었다는 이유로
아이의 성취와 성공을 내 것으로 주장하지 않으면서,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징징대지 않고,
건강한 자아, 건강한 개인으로서의
나를 살기로 결정했다.
나, 엄마이고 또 한 명의 인간으로서의 나로,
살기로 결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