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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이음 Jun 15. 2023

3년 만에 경찰공무원 퇴사한 이유

조금 더 뾰족해지고 싶어서

2019년 12월 경찰공무원 합격(비정규직), 2020년 6월 30일 경찰 배명(정규직), 2023년 6월 1일 경찰공무원 의원면직(퇴사).


경찰생활 3년, 끝


수험생시절 그렇게 입고 싶었던 제복. 아무렇지 않은 듯 자주 입고 이따금씩 불편함을 느낄 때쯤, 간절함으로 가득했던 감정이 점점 바닥이 날 때쯤 그 감정과 함께 제복을 벗어던졌다. 사직서를 제출하고 공무원증, 수갑, 삼단봉, 흉장까지 모두 반납하면 순찰차 앞자리가 아닌 뒷자리에 탈 수밖에 없는 신분이 된다. 수험생활이 짧지도 않았다. 오히려 경찰생활보다 수험생활이 조금 더 길었다. 수험기간을 보상받기도 전에 그만둔 이유는 내 이름이 좀 더 뚜렷해지는 삶을 살고 싶어서였다.


보통의 퇴사 이유를 꼽자면 이렇다. 같이 일 하는 사람이 힘들어서, 일이 힘들어서, 월급이 적어서,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어서. 앞의 이유들이 아예 없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또 그만 둘 만큼 전부는 아니었다. 사람? 3년 동안 순찰팀-순찰팀-내근직-순찰팀 4번의 팀 이동을 겪으면서 같이 일하는 사람 때문에 출근하기 싫을 만큼 스트레스를 받은 적은 없었다. 오히려 늘 팀복은 꽤 괜찮았다. 물론 트러블이 있는 누군가는 있었지만 딱히 마주칠 일이 없었다. 일? 순찰팀 10개월, 내근직 2년 이상. 순찰팀 업무는 논외로 하고, 순찰팀보다 오래 근무한 내근직 업무는 공무원 업무가  비슷비슷하듯 할만했다. 물론, 숨 막히는 날도 없진 않았다. 월급? 많지는 않았지만 먹고 싶은 거 먹고, 배우고 싶은 거 배울 정도의 생활은 됐다. 당장 내일의 생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될 정도. 물론, 딴생각하지 말라는 국가의 깊은 뜻 덕분인지 엄청난 부를 이룰 정도의 월급은 되지 못했다. 좋아하는 일? 좋아하고 더 잘하고 싶은 일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에 모든 사활을 다 걸정도로 두각을 나타내는 재능은 아니었다. 오히려 재능이라는 단어는 날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그런 희망을 갖는 행위가 조금은 낯선 일이었다.


월급 밀릴 걱정, 언젠가는 잘릴 걱정, 뒤처지지 않기 위해 실력을 쌓아야 할 걱정 없이 그냥저냥 살 만했다. 내가 덜 하든 더 하든 상관없이 20일만 되면 칼같이 통장에 월급이 꽂혔기 때문이다. 20일이 주말로 넘어간다!? 그럼 금요일 새벽에 월급은 정확하게 꽂힌다. 당장의 의식주를 영위하는 데는 문제가 없는 삶. 하지만, 미래에 대한 걱정 없이 살 만하다는 것은 어느 정도 내 미래가 정해져 있다는 걸 증명하기도 했다. 설마설마했던 그 증명은 이미 계산되어 있는 엑셀시트에서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었다.


엑셀시트 : 너 지금 계급이 뭐야


이음 : 나 순경


엑셀시트 : 여기 이 칸에 순경 넣어봐.


이음 : 엇 내가 지금 받는 월급이 이렇게 계산되는 거야?


엑셀시트 : 어어, 지금은 그렇고. 너 승진에 욕심 있어 없어? 퇴직할 때쯤 계급 뭐 달 것 같아?


이음 : 나 승진에 관심 없어. 그냥 근속승진. 경감까지는 달지 않을까?


엑셀시트 : 이게 네가 30년 후에 받게 될 월급이야.


이음 : 와... 근데 그때쯤이면 물가도 오르고 뭐도 오르고 다 오를 텐데. 이거로 가능하다고?


엑셀시트 : 그래서 공무원은 월급이 적은 대신 연금이 보장되어 있잖아. 요즘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지?. 챗 gpt 봐봐. 요즘 학생들 그걸로 과제하고, 직장인들도 그거로 보고서 쓴다고 하잖아. 심지어 이것뿐만이 아니야. 무슨 연애편지까지 써주더라. 그래서 '그런 것들에 뒤처지지 않는 뭐 창조적인 것들을 해야 한다' 이러는데 그게 뭐 쉽냐. 어제까지만 해도 있던 직업이 오늘 사라지는 시대잖아. 이렇게 불확실한 시대에 ‘보장’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귀해? 넌 그 단어를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직업이야. 그냥 성실하게만 살면 돼.


보장된다는 것의 의미


하지만, 그 귀하디 귀한 보장이라는 단어는 생각보다 응큼했다.


보장 :  어떤 일이 어려움 없이 이루어지도록 조건을 마련하여 보증하거나 보호함.


여기서 말하는 어떤 일은 먹고사는 일이었고, 조건은 현재의 월급과 미래의 연금이었다. 근데 이 보장이라는 단어를 지키는 데는 생각보다 큰 힘이 들지 않는 반면에 큰 힘이 들었다.


큰 힘이 들지 않는다는 건 공무원의 직위를 지키는 것을 뜻한다. 어찌 됐든 보장이라는 혜택을 받으려면 결국 공무원의 직위를 지켜야 한다는 것인데 이따금씩의 업무 미숙으로 인한 경위서를 쓸지언정, 의무위반으로 인한 징계를 받을지언정 결국 결론에 다다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반면에 큰 힘이 드는 곳은 따로 있었다. 바로, 최대한 평범해야 하는 일. 남들만큼 업무를 쳐내야만 하면서도 남들보다 업무를 더 할 필요도 없었다. 업무를 할 때는 이미 정해진 틀이 있었고 이미 내려진 답이 있었다. 전년도에 기안했던 공문을 카피해서 올해의 추진 배경을 얹어주면 그만이었다. 더 하지 않고, 덜 하지 않아도 문제 될 것들은 없었다. 기안만 내 이름으로 올라갈 뿐 결국 그들의 입맛에 맞춰야만 했다. 입맛을 맞춰줘야 하는 것은 상급기관뿐만이 아니었다. 민원인의 타이틀을 달고 오만가지 떼를 부리는 자들을 대처하는 일이었다. 진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경찰 공무원으로서 도와줄 수 있는 것들은 극히 제한되어 있었고 민원인의 가면을 쓴 속이 시커먼 자들에게는 오히려 과한 친절을 베풀어야만 했다. 호환마마에게 친절을 베풀지 못했을 시 터지는 후환은 오로지 내가 감당해야만 했다. 그런 속이 시커먼 자들은 공무원들을 괴롭히는 방법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덕분에 과한 친절을 베풀지 못했던 죄를 보고서라는 형태로 속죄해야만 했다. 최대한 잘못한 척해야만 하는 시스템.  결국 업무를 대하는 태도의 반경은 점점 좁아지기 시작했고, 그 공간에는 냉소가 들이차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면 일을 만들지 않을까, 어떻게 하면 민원을 먹지 않을까, 어떻게 하면 더 쉽게 할 수 있을까. 기업이 아닌 사람을 위한 일을 하고 싶었던 수험생 때의 당당한 마음가짐은 이미 쪼그라들 때로 쪼그라든 채로.


세공될 수 있도록


결국, 이 공간에서 하는 모든 일은 색깔 빼내기 작업이었다. 나를 덜어내고 덜어내야 큰 문제없이 하루가 끝날 수 있었다. 일을 하면 할수록 뚜렷한 색깔로 빛나는 것이 아닌, 고통스럽게 색깔을 지워내야만 했다. 돈을 벌어야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라면, 돈을 벌어야 하는 시간이 하루에 상당 부분 차지한다면, 그 시간을 쌓으면 쌓을수록 뾰족해지는 일을 하고 싶었다. 시간을 쌓는 기준은 단 하나. 누군가의 지시에 의해서 하루가 몽땅 가버리는 것이 아닌 스스로의 지시에 의해서 하루가 쌓여가는 일들. 전자의 삶을 살 때는 불안한 마음이 잘 일지 않았지만, 후자의 삶은 불안한 마음이 조금 자주 고개를 든다.


하지만, 조금 더 일찍 불안을 마주해 보기로 했다. 불안 뒤에는 조금 더 세공된 모습이 있을 거라 기대하며.





https://youtu.be/azv-ccpw3d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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