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현실에 답이 있습니다
"딱 한 달만 지나 봐, 공무원 때려친 걸 땅을 치고 후회하게 될 걸"
퇴사한 지 한 달이 조금 넘었다. 부러움을 삼키고 걱정을 가장한 채 내뱉는 문장에 다행히도? 아직은!? 후회라는 감정이 찾아오지는 않았다. 그 감정보다 더 잔혹한 건 다름 아닌 현실이기 때문. 조직에 있을 때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모래성 무너지듯 사라지고 나면 그것들을 스스로 재건해내야만 한다. 오늘은 퇴사 후 맞닥뜨린 현실, 그러니까 사라지는 것들에 대해, 재건해 내는 방법들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가장 먼저 일 할 수 있는 사무실이 사라진다. 사무실이 사라진다는 것은 단순히 물리적 공간이 사라지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 공간에 떠다녔던 분위기까지 모두 사라지고 만다. 긴장감이 맴도는 사무실의 공기, 당연하게 여겼던 사무용품들, 그 공간에 맞는 복장, 밥 걱정 할 일 없는 구내식당..
타인의 손길이 닿은 덕분에 형성됐던 분위기들.
그 분위기 덕분에 늘 조금은 긴장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조직을 벗어나 혼자가 되면 이 모든 것들을 재건해 내기 위한 설계도면부터 다시 그려야 한다. 정해진 시간에 일을 끝낼 수 있는 분위기도, 사소한 물품들의 구비도, 자꾸만 츄리닝에 손길이 가는 나약한 의지마저도. 그중 오늘 먹을 점심을 정하는 일이 매일 맞딱들이는 최대의 난제다.
이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집에서 나름대로 업무공간도 조성해 봤다. 컴퓨터를 하는 공간과 책 읽고 글을 쓰는 공간을 따로 분리할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이상하게도 집은 밖에서 만큼의 능률이 오르지 않았다. 3~4시간 정도의 집중은 어렵지 않았지만 그 이상 넘어가면 쉽게 졸렸고, 쉽게 딴생각이 불쑥 찾아왔다. 쉽게 찾아오는 것들은 해야 할 것들의 끝을 보는 일을 자주 어렵게 만들었다. 여유를 부리며 하루를 보내기에는 해야 할 것들도, 하고 싶은 것들도 늘 쌓여있었다. 결국에는 일 할 수 있는 책상, 의자, 컴퓨터가 구비된 사무실보다 중요한 것이 있었다. 약간의 긴장감이 떠다니는 분위기가 먼저였다.
일단은 나가야만 했다. 맥북, 아이패드, 노트, 책을 모두 때려 넣고 9시가 되면 어김없이 나갔다. 매일 카페로 출근했고, 몇몇 카페를 전전한 끝에 분위기가 고요한 카페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긴장감 유지에는 제격이었다. 그렇게 카페를 전전한 지 한 달째. 늘 이렇게 카페만 전전하는 삶이 반복된다고 생각하면 내 미래가 조금은 시시해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가끔은, 두근거림이 필요했다.
비록, 지금은 조금 퍽퍽하지만 더 나아질 거라는 기대감
한강뷰가 펼쳐지는 사무실을 한 달에 한 번 무료로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장소는 여의도. 누구나 더 나은집에서 살기를 원하듯 더 나은 사무실에서 일하게 될 거라는 기대감을 불어넣기에는 충분했다. 그렇게 여의도로 출발한 어느 날. 처음부터 쉽지 않았다. 지하철 정거장마다 정차할수록 내 몸은 점점 쪼그라들었고 내게 허용된 공간은 발자국 한 뼘 정도였다. 이 이상 벗어났다가는 남의 정강이를 걷어 찰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지하철에서 읽으려고 준비해 주었던 책조차도 읽기 어려운 상황이 되자 내 시선은 타인을 향하기 시작했다.
그 타인들로부터 이상한 자극이 여러 번 들어오기 시작했다. 한 손에는 펜, 한 손에는 책을 쥐고 책의 내용을 흡수하듯 메모해 가면서 읽는 사람, 이미 지옥철쯤은 별 거 아니라는 듯 전자기기로 책을 읽는 사람들, 예의를 갖추었으면서도 개성이 나타나는 패션들. 예약해 둔 사무실에 다다르면 펼쳐지는 한강뷰. 간식조차도 건강에 신경 쓴듯한 단백질 음료와 아몬드 우유들. 어딘가 모르게 쾌적한 사무실 분위기. 그리고 회의실에 모여있는 사람들의 눈빛. 상대방의 의견을 진정으로 경청하고 의견을 나누는 사람들.
태도, 복장, 눈빛.. 어딘가 모르게 그들은 자신의 삶에 애정이 있는 것만 같았다. 내일이 기대되지 않는다면 무언가를 읽을 필요도, 제대로 된 옷을 입을 필요도, 빛나는 눈빛도 아마 없었을지도. 내일이 나아질 거라는 기대감에는 삶의 여러 부분에 깃들어 있었다. 내가 하고 있는 일에 기대감을 품고 있다면 더 세세한 것들을 들여다봐야 했다. 단순히 기대감에만 젖어있지는 않은지. 태도는 분명하게 하고 있는지. 늘 깔끔한 복장을 유지하는지. 내 눈빛이 생기를 잃지는 않았는지.
퇴사를 하고 가장 쾌재를 불렀던 것이 사라진 인간관계였다. 하지만 막상 사라지니 가장 크게 공허함이 느껴지는 것이 바로 사람이었다. 조직에서 인맥이 크게 작용하는 것에 거부감이 컸다. 누군가는 간절히 바라는 자리, 흔히 말하는 꿀보직의 경우 거의 인맥이 작용했다. 이 한마디면 됐다.
"김순경, 나 거기 팀장 잘 알아. 필요하면 언제든 말해. 내가 잘 말해줄 게."
물론 이 인맥으로 거래관계가 성사되는 것이 리스크를 최소화할 수 있다는 것쯤은 안다. 누군가가 한 번 인정한 사람이 상사 입장에서는 최소한의 안전장치일 수 있으니까. 내가 상사였어도 그랬을 것 같으니까. 그런데 조직에서의 인맥에는 업무능력보다는 관계능력이 우선시되는 것 같았다. 업무는 평타만 치면 상관없었고, 그 외의 것들이 훨씬 더 중요했다. 가령, 상사의 비위를 잘 맞춘다거나, 술을 아주 잘 마신다거나, 무슨 일이든 네 네하고 말대꾸 없이 일을 해낸다던가. 그런 것들을 통과해 내면 내가 인맥이라고 부를 수 있는 자의 입김은 세게 작용했다. 그 입김에 실려 앉은자리에 보답하려면 통과해 낸 것들을 또다시 반복하는 일뿐이었다. 인맥이 곧 실력. 나는 그런 측면에서는 무능력했다. 무능력했기에 도망쳤다.
하지만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는 세상은 늘 사람이 필요했다. 내가 글을 써도, 영상을 만들어도 늘 봐줄 사람이 필요했다. 절대로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아니 혼자 일을 한다고 해도 늘 결괏값에는 사람이 빠질 수 없었다. 사람이 없는 빈자리는 곳곳에서 금방 티가 났다. 문제가 잘못됐을 때 피드백을 요청할 상사도, 스몰토크를 할 동기도, 마음이 잘 맞았던 누군가도 퇴사를 하고 나면 모두 한 순간에 사라진다. 문제가 생겼으면 스스로 해결책을 찾아야 했고, 일을 하다가 힘들 때는 혼잣말로 중얼거려야 했고, 내 마음은 내가 잘 유지해야만 했다. 사람이 싫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과 함께 성장할 수 있었고, 의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너한테 도움 될 인맥을 만들어봐. 모임 같은 것도 나가보고."
인간관계에 애쓰는 것은 이미 20대 때 해봤다. 모임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관계 유지를 위해 약속이 잡힌 날에는 어김없이 참석해 하하 호호했고, 단체카톡방의 알람이 울리면 늘 이모티콘 하나라도 띄우며 그 대화에 동참하려 했다. 하지만 그렇게 형성된 관계는 그때뿐이었다. 모임의 특성상 모두의 마음이 한 방향을 향하지 않는 이상 지속적으로 유지되긴 어려웠다. 늘 짧고, 굵었고, 쉽게 끊어졌다. 그리고, 잔인한 사실은 자신에게 조금이나마 득이 되는 사람에게로 그 관심이 쏠렸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이득은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 나에게 재미를 주든, 배울 점을 주든, 그 관계를 유지했을 때 나에게 긍정적인 효과로 작용되는 그런 사람. 그런 사람들은 자신만의 색이 있었다. 그 색은 그 사람이 오랜 시간 쌓아온 것들에서 빛이 났다.
사라진 인간관계를 복원할 수 있는 건, 나를 쌓는 일이었다.
나를 쌓으면 그걸 필요로 하는 사람은 분명 나타나지 않을까? 내가 인맥이라는 단어를 붙일 만큼의 주체는 되지 못한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 단어를 붙이고 싶은 사람들을 관찰했다. 주변에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사람들, 늘 어딜 가나 인기가 좋은 사람들을 촘촘하게 보다 보면 생각보다 답은 쉽게 나왔다. 색이 뚜렷한 사람들은 오랜 시간 쌓아온 실력이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사라진 인간관계에 불안해할 시간이 없다. 신중한 마음으로 실력을 쌓으면 문제는 쉽게 해결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쩌면 잔혹한 현실은 내가 더 뚜렷해질 수 있도록, 스스로 방법을 찾을 수 있도록 세심하게 길을 터주는 것일지도. 아마, 직장인이었으면 주어진 모든 환경을 당연하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현실이 조금 팍팍하게 느껴질 때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면 된다. 왜 퇴사했는지.
"주체적인 삶을 꾸리고 싶어서"
'회사 밖은 지옥이다' 라는 말에 무너지지 말고, 새로운 상황에 불안해하지 말고, 문제 해결의 중심을 나에게 두면 결국에 답은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