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추석 맞이
10일 만에 본 그림자.
모스크바에 도착한 뒤로 쭉
맑은 하늘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비가 오지 않는 날이면 그나마 다행,
구름만 잔뜩 끼어 있어도
“와, 오늘 날씨 진짜 좋다~”
하고 말하곤 했다.
진심이었다.
날씨 탓에 마음이 특별히 가라앉았던 건 아니지만,
러시아에서의 마지막 하루를 남겨둔 날,
그간 숨죽이고 있던 태양이 기지개를 켜듯
파란 하늘과 함께 떠올랐다.
그 순간 마음도 한껏 들떴다.
모든 게 다 잘될 것 같은 기분.
햇살이 이렇게나 사람 기분을 바꿔놓을 수 있다니.
그날 밤 숙소에서 누워 있다가
문득 밖으로 나가고 싶어졌다.
네바강은 새벽이 되면 도개교가
하나둘씩 열리는 도시다.
밤산책을 하며 네바강과 활짝 열린 도개교,
반짝이는 물결, 살랑이는 바람을 느꼈다.
이 기억은 꽤 오래 갈 것이다.
미완성 견학 에르미타주.
에르미타주 미술관에 갔다.
엄청나다는 소문은 익히 들었지만
막상 안에 들어가니 5분만에 실감했다.
‘이건 하루 만에 못 보는 구조다..!‘
우리는 본관만 부지런히 보고 나왔다.
신관은… 언젠가 또 올 날이 있다면
그때로 미뤄두기로.
햇빛은 타이밍이다.
다음 목적지는 상트 근교에 있는
뻬쩨르고프 여름궁전.
가는 길엔 어김없이 구름이었다.
‘오늘은 역시 흐리겠군’ 하고 포기할 즈음,
궁전 앞 정원에 도착하자
구름이 순식간에 걷혔다.
햇빛이 황금 조각상과 푸른 잔디를 비췄다.
‘진짜 나 운 좋은 사람인가 봐…’
정원을 따라 걷다 보면
발트해로 이어지는 물줄기가 나타난다.
풍경이 워낙 멋져서 여름궁전이란 이름이
괜히 붙은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햇빛 아래에서 본 뻬쩨르고프는
정말로 여름의 청량함을 떠올리게 했다.
김치, 러시아호스텔을 접수…
저녁엔 친구가 한국에서 공수해온 김치 덕분에
간만에 김치부침개를 해 먹었다.
추석 연휴를 맞아 러시아로 날아온 친구의
감동적인 선물이었다.
‘이게 얼마만의 김치야!!!‘
김치를 꺼내 재료를 준비하는 순간부터
호스텔 안은 작은 파티장처럼 떠들썩했다.
“나도 있다가 조금 먹어볼 수 있을까?”
부침개를 굽기 시작하니 군침도는 냄새가
호스텔에 퍼졌다.
주변 사람들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하나둘 모여들더니 결국 일곱 명이 함께
식탁을 차렸다.
부침개를 포크와 나이프로 잘라 먹는 모습은
꽤 낯설었지만 귀여웠다.
매워하면서도 맛있다며 반짝이는 눈들!
예상치 못한 2차.
그리고 부엌에서
한국인 여행자 한 분을 새로 만났다.
“김치부침개 드실래요?”
“앗… 감사합니다!”
부침개 한 장 건넨 것뿐인데
그는 고맙다며 설거지를 도와주고
심지어 밖에서 보드카와 고급 안주까지 사오셨다.
그리하여 시작된 즉석 2차.
나는 그날 알았다.
보드카가 이렇게 맛있는 술이라는 걸.
여행자들의 밤은 오늘도 어김없이 즐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