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러시안들이 반한 김치부침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추석 맞이

by 밍영잉

10일 만에 본 그림자.


모스크바에 도착한 뒤로 쭉

맑은 하늘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비가 오지 않는 날이면 그나마 다행,

구름만 잔뜩 끼어 있어도

“와, 오늘 날씨 진짜 좋다~”

하고 말하곤 했다.

진심이었다.


날씨 탓에 마음이 특별히 가라앉았던 건 아니지만,

러시아에서의 마지막 하루를 남겨둔 날,

그간 숨죽이고 있던 태양이 기지개를 켜듯

파란 하늘과 함께 떠올랐다.

그 순간 마음도 한껏 들떴다.

모든 게 다 잘될 것 같은 기분.

햇살이 이렇게나 사람 기분을 바꿔놓을 수 있다니.


그날 밤 숙소에서 누워 있다가

문득 밖으로 나가고 싶어졌다.

네바강은 새벽이 되면 도개교가

하나둘씩 열리는 도시다.


밤산책을 하며 네바강과 활짝 열린 도개교,

반짝이는 물결, 살랑이는 바람을 느꼈다.

이 기억은 꽤 오래 갈 것이다.



미완성 견학 에르미타주.


에르미타주 미술관에 갔다.

엄청나다는 소문은 익히 들었지만

막상 안에 들어가니 5분만에 실감했다.

‘이건 하루 만에 못 보는 구조다..!‘

우리는 본관만 부지런히 보고 나왔다.

신관은… 언젠가 또 올 날이 있다면

그때로 미뤄두기로.




햇빛은 타이밍이다.


다음 목적지는 상트 근교에 있는

뻬쩨르고프 여름궁전.

가는 길엔 어김없이 구름이었다.

‘오늘은 역시 흐리겠군’ 하고 포기할 즈음,

궁전 앞 정원에 도착하자

구름이 순식간에 걷혔다.

햇빛이 황금 조각상과 푸른 잔디를 비췄다.

‘진짜 나 운 좋은 사람인가 봐…’


정원을 따라 걷다 보면

발트해로 이어지는 물줄기가 나타난다.

풍경이 워낙 멋져서 여름궁전이란 이름이

괜히 붙은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햇빛 아래에서 본 뻬쩨르고프는

정말로 여름의 청량함을 떠올리게 했다.




김치, 러시아호스텔을 접수…


저녁엔 친구가 한국에서 공수해온 김치 덕분에

간만에 김치부침개를 해 먹었다.

추석 연휴를 맞아 러시아로 날아온 친구의

감동적인 선물이었다.


‘이게 얼마만의 김치야!!!‘


김치를 꺼내 재료를 준비하는 순간부터

호스텔 안은 작은 파티장처럼 떠들썩했다.


“나도 있다가 조금 먹어볼 수 있을까?”


부침개를 굽기 시작하니 군침도는 냄새가

호스텔에 퍼졌다.

주변 사람들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하나둘 모여들더니 결국 일곱 명이 함께

식탁을 차렸다.

부침개를 포크와 나이프로 잘라 먹는 모습은

꽤 낯설었지만 귀여웠다.

매워하면서도 맛있다며 반짝이는 눈들!


예상치 못한 2차.


그리고 부엌에서

한국인 여행자 한 분을 새로 만났다.


“김치부침개 드실래요?”

“앗… 감사합니다!”


부침개 한 장 건넨 것뿐인데

그는 고맙다며 설거지를 도와주고

심지어 밖에서 보드카와 고급 안주까지 사오셨다.

그리하여 시작된 즉석 2차.


나는 그날 알았다.

보드카가 이렇게 맛있는 술이라는 걸.


여행자들의 밤은 오늘도 어김없이 즐거웠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