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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토 Apr 08. 2024

아직, 어머니의 응원이 필요하다

23. 다시 응급실로


늦은 밤, 시어머니가 계신 요양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어머니의 산소포화도가 계속 떨어진다고.

급하게 앰블런스를 불러 성모병원으로 간단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남편과 나는 바로 병원으로 출발을 했다.

  

응급실은 이름과 달리 언제나 응급하지 않다. 응급실에 들어가려면 보호자 등록을 먼저 해야하는데, 보호자 등록을 하고도 한참을 기다려서야 들어갈 수 있었다.

시어머니는 엠블런스에서 한참 동안 가픈 숨을 쉬어야했다, 노인들은 살아온 세월이 그래서인지 뭐든 잘 참았다. 어쩌면 노쇠한 몸이 아픔도 재빠르게 알아채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응급실에서의 처치는 새벽까지 이어졌다. 어머니를 모시고 응급실로 들어간 남편은 시시각각 변하는 상황을 문자로 알려주었다. 썩션으로 많은 양의 가래를 빼냈고, 엑스레이로 본 어머니의 한쪽 폐가 쪼그라들어 있다고 한다. 의사는 입을 통해 기관삽관을 해서 호흡을 도왔다. 그러자 산소포화도가 올라가 정상으로 돌아왔다.

나는 새벽녘에야 병원을 나섰다. 내일 남편을 교대해주려면 이제라도 좀 쉬어야했다.


아침에 지칠대로 지친 남편이 집으로 돌아오고, 내가 병원으로 향했다. 시누이는 제주도 여행을 간 상태였고, 시동생 혼자서 병원에 남아 있는 것이 안타까워 서둘렀다.

응급실에서 밤을 보낸 시어머니는 아침에 중환자실에 자리가 나서 옮기게 되었다. 중환자실로 가게 되면 당분간은 시어머니를 볼 수 없을 것이었다. 나는 중환자실 앞 복도에서 시어머니를 기다렸다. 스치듯이 지나가고 말겠지만 걱정스런 맘에 그렇게라도 보고싶었다.


어머니를 중환자실로 모시고, 중환자실 간호사가 환자에게 필요하다고 알려준 물품을 사다 날랐다. 그리고 어머니 안부를 물을 수 있는 의료진 연락처까지 챙기고 나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비로소 어머니를 제외한 가족 모두 쉴 수 있게 되었다. 어젯밤부터 다음 날 낮까지 다급하게 이어진 시간이었다.   



        

중환자실에서는 하루에 한번 정도 어머니의 상태를 전화로 알려주었다.  남편은 긍정적인 사람이라 조금씩이라도 나아지고 있다는 부분에 집중하며 희망적인 생각을 하려 애를 쓰고 있었다. 숨소리도 조심스런 하루하루였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으니 책을 뒤적이고, 핸드폰을 들여다봤다. 그러다 어머니와 나눈 카톡을 쭉 보게되었다.

나이를 먹으며 일 년이란 시간은 길지 않다고 여기며 살았다. 그런데 바로 일 년 전, 아니 몇 개월 전에도 상황은 너무 달랐다. 그때 어머니는 내게 카톡을 보내고 있었다. 내가 이사를 한 2월에는 오타가 나는 문자로 이사에 보태라고 돈을 보냈다고 했다.

난 가끔 생각한다. 갑자기 달라지는 이 상황이 너무 기가 막히다고. 기막힌 일은 이미 지난 겨울 아빠를 떠나보내며 겪었는데, 나는 다시 너무 기가 막힌다.      




시집을 왔는데

시집 식구들이 너무 다 낯설고 불편한데

그래서 모든 것에 눈치가 보이는데

그런 나를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어머니가 그랬다.

사실 처음엔 어머니가 제일 먼저 불편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시집 식구 중에 어머니를 제일 먼저 알게 되었고,

어머니도 나를 아는 듯이 말을 건네주고, 알아봐 주었다.

살림하는 내가 무엇이 힘들고 불편할지 헤아려주고

먼저 산 사람으로 너무 힘들게 살지 말라는 당부를 했다.

지나서 생각해보니 그런 당부를 내게 가장 많이 해준 사람이 어머니였다.

어쩌면 흔히 말하듯 ‘시집 와 고생한다’ 여겼을 수도 있고

‘나’라는 아이를 그리 걱정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어느 순간 어머니는 나를 통해 안심했다고 생각한다.

시댁 형제 중 우리가 늘 뒷전일 때는

우리만 홀대한다고 서운하기도 했는데

어머니는 나를 믿고 그랬던 거 같다.

나라면 잘 해내고, 잘 헤쳐나갈 거라는 믿음 말이다.

난 아직도 어머니의 응원이 필요하다.

가끔 ‘내가 친자식이 아니라 저러시는 거겠지’하고 서운했는데

나의 서운함은 내가 그분의 친자식이 아니라는 부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어린 맘에 하는 투정일 뿐이지.

내게는 여전히 투정이 가득하다.

떠난 지 수 개월이 지난 아빠에게도 투정하는 맘이 있고,

며칠째 얼굴을 보지 못한 중환자실의 시어머니에게도 그렇다.

너무 믿기 힘들게 기가 막혀서

어쩌면 그리 쉽게 멀어져가는지 따라가기 벅차서

나는 새벽마다 기도를 하고

혼잣말을 하며 투정을 부리고,

투정 부린 것이 미안하여 이내 다짐의 말을 한다.

‘어머니 걱정 마세요. 가족 잘 돌볼게요. 그렇게 걱정하시는 시동생도 살피며 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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