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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토 May 02. 2024

살만큼 살았나요?

축제 같은 죽음을 위하여

살만큼 살았다는 얼마나 산 것일까?

난 어느 날 무척이나 궁금했다. 그래서 얼토당토않게 컴퓨터에 검색을 했다. 내가 원하는 답이 나올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했다.      

그중 눈에 띄는 것은 인간의 DNA는 기본적으로 38세를 수명으로 하는데, 생활환경의 변화와 의학의 발달로 수명이 늘었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일정 나이에 이르러서는 수명은 더 이상 크게 늘지 않았다.

1840년 영국 웨일스 지역의 기대 수명은 79세였는데 오늘날은 86세라고 한다. 200년 가까운 시간 동안 과학 기술의 발달은 눈부셨는데 그사이에 수명은 7년이 늘었고, 암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지만 그 결과 암 환자의 수명이 는 건 4년 정도라고 한다.

4년과 7년은 짧지 않은 시간일 것이다.

하지만 이건 결국 인간 수명에 한계는 있다는 걸 의미한다.

사람이 더 살고 싶어서 안달을 한다고 해도 분명한 한계가 있으니, 우리는 어느 정도에서 그 욕심을 버려야 한다.


어처구니없는 검색어로 서치를 시작했지만  

어렴풋이 내게 드는 생각은 살만큼 살았다는 것은 스스로 정의 내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의학은 분명 한계가 있고,

아니, 인간의 한계가 분명하다.

인간은 반드시 죽는다는 팩트를 기억하여

각자 원하는 삶을 살고, 어느 순간 스스로 그런 정의를 내리는 거다.


생명체인 우리에게 확실하게 알려준 미래는

죽음 하나뿐이다.

그걸 떠올리며 살아야 하고,

그걸 맞이하기 위해 살아야 한다.

살만큼 살았다고 느끼고, 잘 죽기 위해 나서야 한다.

          



한 물리학자는 죽음에 대한 질문에

우주에는 대부분의 것이 죽어있다고 했다.

생명체가 있는 것은 지구가 유일한 정도라고.

그러니 죽음이란 이 우주에서 어쩌면 더 당연한 것이라고 한다.

거대한 우주의 티끌 같은 지구에 티끌로도 표현할 수 없는 생명체가 우리다.

우리의 죽음은 우주에 아무 영향도 미치지 않고

혹 영향을 미친다면 그건 죽었을 때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거라니.

죽음에 대한 새로운 방향의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죽음을 통해 자연스러운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구나.

그래서 삶을 잠깐의 소풍으로 여기고,

죽음을 다른 차원의 문이 열리는 것으로 여겼구나.‘

    

그러자 내게 목표 하나가 생겼다.

그건 축제 같은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다.

살만큼 살고 죽었다 여기고

죽음에 이르는 일을 축제로 느끼며 떠나고 싶다.


많은 이에게 죽음은 두려움이다.

나도 다르지 않다.

죽음이 두려운 이유는 아무도 죽음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또 어떻게 죽는 건지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둘 중 하나는 알 수 있다.

옛사람들은 어릴 때 할머니, 할아버지 돌아가시는 것을 보며, 자라서는 부모님 돌아가시는 것을 보고 죽음을 배웠다고 한다.

나도 그런 과정을 겪었다.

할머니를 통해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 삶을 이루는 과정 못지않게 어려운 것'임을 보았다.

그리고 아빠와 주위 어르신들을 통해 죽음을 보고 느끼고 있다.

죽음이 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으나

죽음에 이르는 과정은 조금 알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죽음의 과정은 준비할 수 있지 않을까.

어차피 알 수 없는 것이 죽음이니

난 그 과정을 준비하는 것만으로도 내가 할 큰일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계속 책을 읽고, 찾아보고, 들어본다.

알면 알수록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 대한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억지로 붙잡으려 하지 말라는 것이다.

억지로 숨을 쉬게 하고, 영양을 채우는 것이 결코 행복할 수 없다는 것.

모두들 심한 병에 걸려야만 죽는다고 생각하고

그 병을 고치려 들지만 사실 고약한 병보다는 노화로 죽는 것이라는 것.

우리가 아는 고약한 병들은 결국 노화 속에 생겨난 것이었다.




죽음을 떠올리며 가벼운 맘이 될 수는 없다.

안타까운 이별에 눈물이 마르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이때,

내가 건강하고, 자유의지로 많은 것을 행하고, 생각할 수 있을 때, 죽음을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죽음을 고민하기 딱 좋은 시기인 것이다.

난 이 모든 걸, 아빠가, 할머니가, 주위 어르신들이 나를 가르치는 것이라고 여긴다.


그리고 난 우리 엄마도 살만큼 살았다 여기며 떠나실 수 있게 돕고 싶다. 엄마를 모시고 많은 것을 보고, 먹고, 경험하며 행복감을 느끼고 싶다.

그 일조차도 내 삶의 살만큼 산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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